통영- 박경리 기념관
2,022년 8월 11일 통영에 갔습니다.
중부지방에는 며칠간 집중호우, 아니 쏟아 붓는 폭우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는데,
남부지방은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먼저 박경리 기념관에 들렸습니다.
2,018년, 작가의 10주기 때 오고 4년 만입니다.
소쩍새, 뻐꾸기, 고들빼기꽃, 벌,....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 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작가의 대표작 대하소설 토지의 도입부이죠.
표류도에 이어 작가 박경리를 본격적으로 알린 김약국의 딸들 중에서.
외동딸인 김영주는 [오적]의 시인 김지하와 혼인하였지요.
얼마전 사위도 타계하였습니다.
왼쪽 두 번째 분장한 인물은 조연현으로 초창기 문학잡지 [현대문학] 주간을 오래 역임하면서 평론가로
한국 현대 소설을 이끈 인물 중 한 분입니다.
함안이 고향으로 제 선친과 초등학교 동기로 선친을 문학의 길로 이끄신 분입니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던 부친은, 전쟁통에 돌아가시고,
남편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행방불명이 되었고 아들도 불의의 사고로 잃고, .....
작가는 젊은 시절 어머니, 딸과 함께 모녀 삼 대가 고달픈 삶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 세상 뜨시고 나서야 불효막심한 자식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작가도 신산했던 시절 어머니를 모시고 외동딸 키우며 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던 효녀였지만 회한을 토로합니다.
맏이셨던 제 어머니는 팔순이 넘어 구순이 되었어도 7남매 중 막내인 제 이모님(1,944년생. 재작년에 돌아가심)
낳고 얼마 안 되어 일찍 돌아가신 당신의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하셨습니다.
작가도 천상,
딱 우리네 어머니 모습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늙어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다가 어머니 먼저 가신
알 수도 없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먼 저 세상으로 한 사람, 두사람,
앞서거니 뒷서거니 돌아갑니다.
작가의 말년을 보냈던 원주의 토지 구입비 영수증
육필 원고
중국 한나라 때 역사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宮刑(궁형. 고대 중국의 형벌 중의 하나로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을 당하고
극심한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삶을 살면서 역사에 길이 남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張三李四 필부인 우리가 그 참담했던 심정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저도 초창기 지식산업사에서 간행한 세로 2단 짜리[토지]부터 읽었습니다.
연재물은 읽지 않아 다음 단행본 나오기를 목을 쭈욱 빼고 몇 달을 기다렸던 세월이 벌써 사십 여년 전이네요.
원주에 있는 작가의 집필실을 재현해놓았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경술 국치, 일본넘의 강제 병탄으로 단군 이래 면면히 오천 년 이어오던 우리나라 역사가
암흑기로 들어섰습니다.
그 암울했던 시기, 일제 식민시대,
제 아버지(1,920년생)와 어머니(1,927년생)와 동 시대를 사신 작가 박경리는,
저의 선친에게 파시, 표류도, 김약국의 딸들이라는 작품 이야기를
많이 듣고 소시쩍부터 읽어 알았습니다.
지금은 줄거리도 다 까묵었지만.
작가의 대표작,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함안댁이 나오는 것도 참 신기했습니다.
고향이 통영이고 진주고녀에 다니신 분이라 함안이 근방이니 그 많은 등장 인물 중 함안이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범부채
수련
수국
선생의 묘소로 올라갑니다.
팔월의 나무 배롱나무가 붉게 안내를 합니다.
박경리 선생의 묘소.
아쉽게도 떼가 잘 살지를 않네요.
4년 전보다 더 듬성한 같네요.
너무 가물어 그렇나? 토질이 그렇나?
묘소에서 바라본 삼덕항과 앞의 곤리도
기념관 옆의 사마천 시비
어머니 같은 위대한 한국의 대표 소설가 박경리 선생 앞에서
부부가 찰칵!
인간은 태어날 때 두 주먹 꽉 쥐고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두 손 다 펴고 죽습니다.
가진 억만금의 부도, 그 좋던 인물도, 명예도,
부질없는 한 줌의 뜬 구름이니 아무 소용없이 다 놓고 가는 겁니다.
生也 一片 浮雲起, (생야 일편 부운기요)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읾이요,
死也 一片 浮雲滅.(사야 일편 부운멸이니)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니...
이제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부지런히 비워야겠습니다.
혼자서 73년, 둘이 만나서 43년!
그동안 참 많이 살았습니다.
비록 의식은 없으셨지만 손은 말랑하고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평소 유난히 손이 찬 저는 그날은 마음까지 시려서 차갑게 경직된 두 손으로 선생님의 따슨 손을 마냥 조몰락거렸습니다.
제 언 손을 녹이고자였습니다.
실은 두려워서 떨리는 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겁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을 뵐 때마다 뭔가를 얻어가져 버릇해서, 빈손으로 고독하게 이 세상과 하직할 준비를 하고 계신,
그 절체절명의 엄혹한 순간에도 선생님의 마지막 체온이라도 탐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참람한 마음이 듭니다.
선생님은 제가 원주에 갈 적마다 뭔가를 먹이지 못해 하셨고 돌아올 때는
김장이나 된장은 선생님을 믿고 아예 담그지 않았고, 일부러 감자 캘 때나 옥수수 익어갈 때를 맞춰 가서
단구동 댁 마당에서 해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던 여러 그루의 대추나무와 그 틈에 뱀이 산다는 돌무더기들,
문화관이 있는 매지리 댁의 잘 생긴 간장 된장독이 즐비한 장독대는 언제 꺼내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그리운 고향집의 흑백사진입니다.
대작을 쓴 곳이라곤 믿어지지 않게 별 볼 것 없는 소박한 집필실보다는 이층 베란다 난간에 즐비하게 널려있던
저렇게까지 하실 게 뭐 있나, 대충 사시지. 이런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단구동 댁의 으뜸 효자는 아마도 대추나무였을 겁니다. 사람 손이 덜 가고도 풍부한 열매를 맺어,
가을이면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르던 지인 후배들은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계절인사처럼 잘 익은 대추를
그 대추나무들이 돌림병으로 죽은 것과 ‘토지’ 완간 기념 잔치를 성대하게 연 것과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는
사람 사는 집에서는 어차피 큰일과, 작은 일, 기쁜 일과 언짢은 일이 번갈아 가며 일어나게 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지금도 단구동이 그리운 것은 대작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비롯해서 우리 문단과 문학 애호가들이
제가 죽을 것처럼 힘들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세상을 안 볼 것처럼 자신 안에 꼭꼭 칩거해 있을 때 저를 반강제로
그 최초의 외출이 단구동 선생님댁이었습니다.
김성우 논설위원도 같이였구요.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가 무작정 간 게 아니라 선생님이 그렇게 시키셨겠지요.
손수 지으신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으니까요.
그때 선생님이 지으신 따슨 밥과 배추속대국을 눈물범벅으로 아귀아귀 먹게 하신 선생님의 사랑인지 우격다짐을
잊어버리면 사람도 아니지요. 대범한 줄로만 알았던 선생님이 처음으로 내보이신 따뜻한 속 정에 저는 비로소
그리고 다시 선생님이 제 등을 떠미시니 바깥세상으로 나가기가 한결 수월해지더이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외동딸은 아니었나 봅니다. 단구동 댁을 기념관으로 내주시고 더 큰 터전을 잡아
후배 작가들이 머물며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는 문화관을 따로 지으셨습니다.
얻어올 수 있는 게 텃밭에서 나는 채소에다가 오봉산에서 나는 오가피나 두릅 취나물 등으로 늘어나긴 했어도
어쩌겠습니까. 아우들이 조롱조롱 생겼는데 맏이는 젖이 떨어질 수밖에요.
저도 문화관 식구가 되어 선생님의 공짜 밥을 얻어먹어 버릇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대신 해주는 밥이지만 식탁에 선생님이 손수 가꾸신 채소가 떨어지지 않는 한
제가 단골로 쓰던 문화관 삼 층 끝 방에서는 선생님의 텃밭이 빤히 내려다보였습니다.
아침 일찍 텃밭을 기다시피 엎드려 김매고 거두시는 선생님을 뵐 때마다 철이 난 것처럼 흙에서 나는 모든 것이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지요, 땅처럼 후한 인심은 없다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밭에 엎드려 김을 매고 있는게 아니라 경배를 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입으로 하는 직업적인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천성의 농사꾼이셨습니다.
인간의 피땀과 등골을 있는 대로 빼먹어야 거기 합당한 이자를 붙여주는 게 땅 아니던가요.
그래서 사람들은 땅의 그런 느리고 인색한 보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까짓 땅 기운을 아예 시멘트로 틀어막고
선생님은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 늘 못마땅해 하시면서 분개도 많이 하셨죠.
어떤 권력자나 재력가 앞에서도 당당하고 거침없이 할 말 다하시던 선생님이셨으나
댁에 늘 문화관식구들이 먹고 남을 만큼 먹을 것이 넘치는 게 다 오봉산 덕이라고 문화관을 품고 있는 산한테까지
어찌 산과 들에서 나는 것뿐이겠습니까.
특히 뽈락이라는 작은 생선은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거였습니다.
어느 핸가 명절을 앞두고 있어 우리도 뭔가 작은 선물을 사 가지고 갔는데 선생님댁 주방과 거실에는
그런데도 문화관 식구들을 잘 먹일 수 있어서 어떤 선물보다도 먹을 것이 제일 반갑다고 인사 치레를 하시고 나서
“난 저 쌀독만 있으면 돼. 저 많은 먹을 것들이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끼니때 쌀독에서 쌀을 한 줌씩 내다가 한 톨이라도 바닥에 떨어지면 엎드려서 손가락 끝으로 찍어 담아야 마음이 편해.”
어려서 집이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어렵지는 않았는데도 우리 엄마는 약간 맛이 간 쉰밥도 버리지 못하고 물에 씻어서 당신 혼자서 드셨습니다.
제가 질색을 하고 말리면 ‘밥이 아까워서 못 버리냐? 하늘이 무서워서 못 버리지’ 하시던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돈으로 치면 몇 푼 안 되는 푸성귀를 얻기 위해 땅을 기던 선생님,
작년 선생님의 마지막 생신 때 생각이 납니다. 그때 우리는 (현대문학 양숙진 주간과 저) 그게 마지막 생신이
따님을 통해 선생님은 치료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아무도 당신 병을 아는 걸 원치 않으신다는 걸 미리 전해
평소와 다름없이 줄 담배까지 피우셨으니까요. 딴 생신 때와 달랐던 것은 우리가 원주로 가지 않고 선생님이
남산의 힐튼호텔에서였습니다.
누가 버릴 세상에 대해 그런 애정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그날 모임의 압권은 호텔 앞에서의 노느매기였습니다.
선생님은 당신 생신을 빙자한 저희의 식사대접 자리에 오시면서도 빈손으로 오시지를 않고 또 원주에서 난 것,
우리 속물들은 국산차만 타고 들어가도, 소형차만 타고 들어가도 주눅이 들것처럼 럭셔리한 것으로는
온갖 촌스러운 것들을 풀어놓고 양 사장 몫과 제 몫으로 나누어 차에 실어주신 선생님 때문에 그날 우리는
그 거침없으심은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러웠습니다.
선생님이 너무 갑자기 이 세상을 버리시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시니 불과 몇 달 전에 있었던 일도 이렇게
생전에 소원하신 대로 선생님은 원주를 거쳐 고향 통영의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원주에서 통영까지 차로 간다는 건 제 몸에 너무 눈치 보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건강상의 이유 말고도 선생님은 원주에 계셔야할 것 같은,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영은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원주에서는 단구동 기념관에서 원주시민들의 진정 어린 애도의 자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매지리 문화관에서
선생님을 배웅하고 나니 노제 지낸 제상만 뎅그머니 남아 있더군요.
누군가가 큰 병에 반 넘어 남아있는 백세주를 따라 마시고 있기에 저도 한잔 달라고 했지요.
당장 입에 침이 고여 얌전하게 네모로 접어 괴놓은 부침개 한 자락을 맨손으로 찢어서 입에 넣었습니다.
개 건너 집이던가요, 아니면 이름은 잊었지만 부부가 다 착하고 진국이라고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길가 식당이던가요.
그런데서 먹어보고 집에 싸 가지고 오기까지 하던 딱 그 메밀부침 맛이었습니다.
거의 투명할 정도로 얇게 부쳐 도리어 메밀의 깊은 맛을 극대화한 부침개 맛은 술을 더 먹고 싶은, 술 허기증 같은 걸 걷잡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것도 술은 꼭 소주여야 할 것 같은. 그 자리에 소주는 없었으므로 우선 먹던 부침개라도 싸 가지고 올 요량으로 주춤대다가 제 주접떠는 모습을 이혜경 작가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이 작가가 부침개는 자기가 얻어 가지고 갈 테니 저더러는 그 아래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데였지만 문화관에서 가장 가까운 데였습니다.
문화관에 묵고 있던 작가들을 비롯해서 통영까지 못 간 몇몇 작가들이 노제 후 거기서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 돼있었던 듯, 오정희 작가 이강숙 총장을 비롯해서 젊은 작가들이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나중에 나타난 이혜경 작가는 메밀부침을 얻어오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집에서 안주로 그걸 시켰지만 그 맛이 아니었습니다. 상관없었습니다. 소주가 있었으니까요.
다른 작가들은 맥주에 소주를 타 마셨지만 저는 순전한 소주를 고집했습니다.
한 번도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의 한이 제 한이었던 곡절까지 매듭이 풀리듯이 허술해졌습니다.
맺힌 슬픔, 의지가지없이 허전한 마음이 헐렁해지자 우리는 찍찍 허튼 수작까지 날리며 희희덕댈 정도로 편안해졌습니다.
생각해보니 선생님과는 한 번도 허튼 수작을 해본 적이 없네요.
이런 걸 선생님의 표현을 빌어 연민이라 한다면 너무 외람될까요.
선생님 가신 후에도 문화관은 이어지겠지만 손수 가꾸신 채소를 다시 얻어먹을 수는 없겠지요.
왜 이렇게 선생님이 거두신 건 야금야금 거저 얻어먹고 싶은지, 그걸 못하게 된 게 왜 이렇게 서러운지
선생님은 후배들이 평생, 그리고 대를 이뤄 자자손손 파먹어도 파먹어도 바닥나지 않을 거대하고 장엄한 문학유산을 남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필생의 업적으로 남기신 토지에는 우리의 파란만장한 근세사의 모든 국면과 모든 직업,
그것도 박제를 만들어 모자이크 한 게 아니라, 그 많은 사건과 인생들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면서 비천한 것들이
마치 지류(支流)의 맑고 탁함을 가리지 않고 받아드린 큰 강이 도도히 흐르면서 그 안에 온갖 생명들을
이 작은 나라에서 그런 큰 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문학이니까 가능한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선생님, 우린 오래오래 두고두고 그 큰 강가에서 목도 축이고 필요한 양분도 취하면서 번성할 테니
저것들이 내 하숙 밥 없이도 잘만 크네, 흐뭇하게 미소지어주시길.
- 이 글은 박경리 선생님 영결식에 받친 조사에다가 그때 시간상 못 다한 이야기를 보탠 글임을 밝힙니다. -
[현대문학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