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칠십을 예부터 古稀라고 합니다
이백과 함께 시성으로 추앙받는 1,300년 전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曲江]시 둘째 수에 나오는 싯귀입니다.
제2수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조정에서 돌아올 때는 날마다 봄옷을 전당 잡혀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매일같이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항처유) 가는 곳마다 술빚은 으레 있고,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인생 칠십 살기는 예부터 드물거니
穿花蛺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견) 꽃 사이를 맴도는 호랑나비는 보일 듯 말듯하고
點水蜻蜓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강물 위를 스치는 물잠자리는 유유히 나는구나.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유전) 전해 오는 말이 봄 경치나 사람이나 쉴 새 없이 변해 간다고 하나니,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잠시 서로 어긋남 없이 상춘(賞春)의 기쁨 나눠보세.
이 시는 번영했던 조국이 안사지란(安史之亂)을 겪은 뒤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채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정의기강은 흐트러져 있고 자신은 말단 관직에서 그저 술에 취해 곡강 연못가를 해맬 수밖에 없는 시인의 절망적인 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정작 시인은 자기의 말대로 칠십은 물론이고 예순도 채 못 산 59세에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동 시대를 산 이백은 그보다 조금 더 산 예순둘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세상을 떴습니다.200억 년 우주의 나이에서 보면 몇십 년을 사나 몇천년을 산들 거기서 거기이지만
한편 3,500년 전 구약시대에도,모세는 "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우리가 날아가나이다.....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했으니이 억겁의 우주 시간에서 인생 백 년이 그야말로 찰나이며 눈 깜짝할 새입니다.한낱 일장춘몽이란 말이지요.
요즘 워낙 속된 말이 난무하니 저도 그대로 따라 하면
아무리 잘 났다고 그래싸도
[인생 백년이니 너무 까불지 마라!] 입니다.
나이가 어느덧 칠십이 되니 감회가 없을 수 없어 몇 자 끄적여봅니다.
장주가 볼 때는 이 또한 아무 부질없는 짓거리이도 합니다만 속 좁은 인간이기에.
지리99에 유반 김종일 선생님, 가객님, 백두대간늑대님, 우듬지님 등 선배 어르신들이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4월 12일, 따뜻한 봄날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온 순서는 세 번째인데 옛날에 유아 사망율이 높은 때라 먼저 태어난 아들은 어릴 때 먼저 가고,
누님 다음의 제가
본의 아니게 4남 2녀 육남매의 큰아들로 자랐습니다.
어릴 적 사진은 작년 가을에 어머니 돌아신 후 산행기에 몇 장 소개되어 생략하겠습니다.
꿈이 많았던가 옳은 기억도 없지만 명찰 붙인 교복 입은 고등학교 때 사진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소시쩍 고딩 때 신문기자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었네요. ㅎㅎㅎ
이루지 못 한 야무진 꿈이었지만.
이 탑이 있는 근방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시기는 제 졸업 후이지만 지리99의 중추 멤버인 다우, 산유화가 같은 학교, 또 인근학교에 다니며 청운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때만 해도 함안 촌에서는 큰 유학길이었지요. ㅎㅎㅎ
머리를 보니 고등학교 졸업 후 같죠?
이 사진은 아마 1,969년쯤,
그때의 시쳇말로 무전여행, 요즘 말로는 배낭여행이랍시고(최소한의 차비 정도만 지니고 하는)
함안을 떠나 경주 부근 감포에서 포항 등 동해안을 따라 주욱 올라 속초 거쳐 간성에서
진부령을 넘어 서울로 가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여수에서 배타고 마산으로 가는 보름간의 여정 중 바닷가 해수욕장 한 장면인 것 같습니다.
사진상으로는 키가 작게 보이지 않네요.
옆의 친구가 고만고만하고 모두 날씬하니 그렇겠지예?
전쟁통 피난지에서 모친이 옳게 못 자셨으니 젖배도 많이 곯았고 그 시절 나라 전체가 어려웠으니 영양상태가 다 안 좋아 키가 자라지 않았고,
거기에다 백날 아기가 대포소리에 놀라기도 하였으니 키가 크지 않은 건 당연지사. ㅋㅋㅋ
1,969년도부터 산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리99 옛산행기방에 올린대로 1,970년 10월 초에 지리산 입문을 했습니다.
그것도 초다듬이에 덜컥 종주로.
부산에서 기차로 진주로 이동하여 버스를 타고 중산리에 도착하니 밤이라, 하루 자고 산행을 시작했지요.
사진은 중산리 숙영지 부근인데 지금 주차장보다는 한참 아래이겠죠?
당시에 지리산에 공수부대가 주둔했습니다.
중산리, 벽소령, 노고단 등.
중산리에서 입산 신고를 하고 산행을 했습니다.
장터목에서 잤던가?
벽소령을 지날즈음 느닷없는 총소리에 놀랐는데 군인들이 권총사격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3박 4일인가 걸었는데 산객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연하천 지나 마지막 날 노고단에서 진행이 늦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 헤매다가 군부대 발전기 소리 듣고 찾아가
부대장 소령의 배려로 밤 매복 나간 조금 여유있는 막사에서 하루 자는 에피소드도 있었지요.
육사 출신 젊은 지휘관은 높은 산중에서(그때는 벽소령 종단 작전도로만 있었으니 성삼재 도로는 당연히 없었음).
대학생 선남선녀를 보고 밸이 꼬였을낀데.
당시에는 등산 인구도 적고 장비도 열악하여 모두 군용 물자를 부산 국제시장에서 구입하여 산에 다녔습니다.
군용 A형 텐트를 비롯하여 수통, 고물 석유버너 등등.......
무겁고 부피도 컸습니다.
지나간 세월이 아득하여 반 세기가 훌쩍 지났네요.
올해 지리산 입문 50 년차입니다.
내년이 만 50주년.
요즘 박배낭은 좁고 머리 위로 올라가는데, 당시에는 옆으로 많이 퍼졌군요.
육군 제2훈련소(논산) 29연대, 27연대, 경찰전문학교의 오랜 교육을 거쳐
지리99의 감성작가 [산용호]가 근무하는 고성 하이면, 하일면에서 군 생횔을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거제 해금강 초소에서 군생활을 마쳤습니다.
제대하고 일 년 후 1,975년 이 뱃지의 직장에 입사하여 32년간 근무를 하였습니다.
2,004년 8월에 이 양반, 배재길님을 묘향암 옆에서 운명의 만남을 하였습니다.
그날이 [지리산아흔아홉골] 태동 1주년이었습니다.
위 사진은 왕시루봉 아래 선교사 유적지네요.
환갑도 전이라 이때만 해도 얼굴이 좀 탱탱하죠?
그동안 혼자서 최화수 선생의 [대하르포 지리산]을 교재로 하여 독학으로 지리산 이 골짝 저 능선을 헤매고 다닐 때였습니다.
지금도 혼자 다니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배재길님 덕분으로 지리99에 들어와 지리산의 새로운 세계에 접하며 많은 산친구들을 알았습니다.
모두 소중한 인연들이고 제가 살아가는데 있어 큰 자산으로 자리잡았음을 알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보잘것 없는 글솜씨지만 산행후기나 일상생활에서 느낀 점들을 지리다방에 올려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십 수년 전, 세석에서 찍은 것입니다.
이때 광주의 누구던가? 아니면 전주의 광속단 일원인 금융기관에 다니는 (운봉에 집 지은 누구죠? 갑자기 닉네임이 생각이 안 나 죄송합니다.)
그 양반을 만났는데......
아! 뫼가람님.
배재길님의 속지인 광양, 순천, 여수의 이른바 전남동부팀과의 교유가 급격히 진전된 데는 배재길님의 매개로, 고 취운님을 알게 되었고,
인정 많은 취운님이 어찌나 챙기든지.......
자연스레 동부팀과 산행도 많이 하고, 번개모임에도 자주 갔습니다.
위 두 사진은 전남동부팀과 회갑기념산행 때 찍은 것입니다.
어느 해 전남동부팀 송년산행 후 송년의밤 행사인 것 같습니다.
광양의 백운, 순천의 백호, 저.
요 아래, 위 좋은 사진들은 한 사진 하시는 백호, 여수의 마루 님이 찍은 것입니다.
영정사진으로 쓰려고 생각합니다.
그 인연으로 회갑기념산행을 전남동부팀과 같이 했습니다.
요즘 지리99에도 모두 발길이 없으니 저도 죄송한 마음입니다.
지리산을 다니는 한편 산악회 따라서 전국 각지의 여러 산도 많이 다녔습니다.
나이 일흔을 또 從心(종심)이라고도 합니다.
[ 從心 ]
마음대로 한다는 뜻으로, 70세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논어(論語)》〈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
(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 칠십이 종심소욕 불유규)."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에서 연유해 뒤에 나이 일흔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學), 30세에 뜻이 확고하게 섰으며(而立)
40세에는 미혹됨이 없었고(不惑), 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으며, (知天命)
60세에는 귀가 순하여 남의 말을 듣기만 하여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耳順),
이어 70세에 이른 뒤의 성취를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이다.
50세의 지천명(知天命)과 60세의 이순(耳順)을 거쳐 공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성인(聖人)의 경지를 이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종심'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혹은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여도
어떤 규율이나 법도·제도·원리 등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하든 일정한 법도가 있었다는 뜻이니,
바로 유교(儒敎)에서 말하는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이름이다.
참 어려운 공자말씀입니다.
하지만 제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지침이기도 하여 성인의 경지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만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
옮겨 봤습니다.
2,500년 전의 공자는 훨씬 뒤의 이백과 두보보다 오래 살아 종심의 연세를 넘어 일흔셋에 별세하였습니다.
종심의 뜻을 느꼈던 거지요.
제 나이 젊을 때, 고희를 맞는 어르신들 보면서 참 대단하시다라고 남의 일인 줄 알았더니 어느날 갑자기 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쏜 살같이 지나가는 인생입니다.
지리산을 다니면서 나이 칠십 때까지는 산에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제 그 생각을 바꾸어야겠지요?
백세시대라고 하니 앞으로 십 년은 더 산에 들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교회에서 둘째 아들 혼인 기념 특송 중입니다.
아내는 감격해 눈을 감았군요. ㅎㅎㅎ
돌도 지나고....
통영 어디?
올해는 혼인 40주년이기도 합니다.
백년해로이면 육십 년을 더 살아야 하나요? ㅋㅋㅋ
어제(4월 12일) 오후 아내가 부산에 계시는 외숙부님께 제 글을 보시라고 보냈더니,
여든셋 노인께서 침침한 눈으로 생질의 글을 보시고 소감을 보내왔습니다.
" 산에서 산삼보다 좋은 인생이 있고 철학이 있고 믿음이 있구나!
강호원의 멋진 삶이 자랑스럽다. 내가 호원이의 외삼촌인 것을 세상이 알아줬으면."
그러면서
" 눈치껏 아내 자랑도 했더라면 하는 것이 외숙의 욕심이다." 하셨습니다. ㅎㅎㅎ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못난 사람을 알아 5년 간 교제 끝에 1,979년 혼인을 했습니다.
당시 많이 어려운 가정형편이었는데가 큰며느리로 부모님 모시고 40년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말년 건강이 안 좋아 같이 다니던 등산도 접고.
외숙부님 욕심대로 등 떠밀려 몇 줄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적습니다.
당신의 헌신과 사랑을 우리 형제자매는 물론 이웃도 다 알아준다고.
그리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이상은 팔불출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광고의 글이었습니다.
소시쩍부터 배구, 농구, 축구, 등 운동을 하는 것, 보는 것 다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80년대 초에 테니스를 배워 지금까지 40년간 즐기고 있지요.
90년대 중반 아내가 명예퇴직 후에 한 10년 같이 운동을 했었는데 아이들 크니 자연스레 테니스를 접더군요.
저만 하기가 참 미안했습니다.
위 사진 둘은 작년 6월,
중경팀의 학봉( 소방관이고 등산, 테니스 등 저와 같은 운동을 좋아함)님이 함안에 와서 찍은 겁니다.
둘째 아이(산꾼아들)도 저 닮아 테니스를 했는데 손자에게 라켓을 주니 좋아합니다.
저거 아비가 알아서 잘 키우겠지만 할애비 마음으로는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습니다.
할배 닮아 지리산을 좋아하면 금상첨화일 터인데 저거 아부지도 정작 지리산은 성삼재에서 노루목, 인월에서 덕두봉, 바래봉,
그리고 천왕봉만 올랐네요.
하도 운동을 안 시키는 교육 풍조라 지 마음껏 크기도 힘든 세상이 안쓰럽습니다.
작년 여름, 출생 이후 처음으로 몽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상세한 건 지리다방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단체사진
우여곡절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등산과 같이.
힘든 오르막도 있고 널널한 평지도 있고, 그리고 급경사 내리막도.
저의 한 평생도 그랬습니다.
인생사 쨍한 햇볕만 있기를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맑은 햇볕만 있으면 세상은 곧 사막이 된다고 하지요.
사변둥이로 태어나 국제시장 영화 내용처럼 그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칠십 년을.
인생 칠십! 물론 어머니 뱃속 일년 포함입니다.
짧지만 않은 세월이었습니다만 지나고 보니 쏜살 같이 흘러간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세월만 허송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安分知足, 내 분수에 만족하며 살면 그게 다 복된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부모님이 주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도 안 계신 부모님이지만 효도이겠지요.
최저임금의 야간근무 일이지만 아직도 일할 수 있어 참 행복합니다.
해마다 다시 시험을 쳐 재계약하는 형태라 언제까지 할는지는 모르지만.
양친이 가르치신 범사에 감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실천하려고 죽을 때까지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일찍이 산을 접하고 그 산을 좋아하고,
산에서 많은 인연을 맺았습니다.
제겐 아주 귀하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가족사진인데 둘째아이 내외가 빠졌네요.
부부가 같이 지리산, 등 산행도 많이 했는데 요즈음은 뜸합니다.
서로 묵기 살기 바빠서. ㅎㅎㅎ
이 사진은 지리산 둘레길 걷기 막바지쯤입니다.
하루가 다르니.....
어제 지리99 중부경남팀에서 거룩한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기념품 은수저 두 벌도 받고.....
백산 강선생의 작품사진도 선물 받았습니다.
중경팀 여러분, 고맙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장삼이사 보통 인간의 한 살이이었지만
산을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지리산을!)
사람을 좋아하고
술을 즐기는 한 사람이었다. 고
묘비에 쓰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 죽은 뒤라 아이들이 어쩔랑가 모르겠습니다.
그냥 기독교인 강 모라고 쓰겠지요.
어줍잖은 개인사를 늘어놓아 죄송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리99 눈팅 때 부터 형님은 저의 지리산 롤모델 셨습니다.
다행히 많은 지리산행을 공유했고
형님을 통해 깊이있는 지리산도 배웠습니다.
선하신 어린양형수님의 정도 듬북 받았고
효자인 산꾼아들을 통한 부모자식과의 사랑도 배웁니다.
띠갑장이란 연을 드리대며 버르장머리 없이 굴었고
많이 형님을 의지했던것도 지리99가 선물해준 고마움입니다.
열심히 사셨습니다.
홀산 많으신 산행기를 보며 ...
언젠가 동행을 언져 지니신 지리산을 나눠 주시면 좋겠다 라는 바램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문이란게 일산행 일산행기를 작성하시는 형님의 인문적 성품을 케치못한 모자란 저의 소양입니다.
건강하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지리산 큰형님들을 뵈면 나이가 숫자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합니다.
십년이 더 지나 팔순때도
지리산 식구들과 더 큰 잔치자리가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그 때는 칠순 다가가는 갑장이 큰 잔에 술을 받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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