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목: 초막터
2, 언제: 2,022. 7. 2.(토, 맑고 무더움)
3, 누구와: 혼자서
4, 코스: 의신마을- 오토바이능선- 초막터- 원통암- 의신(약 8.5km)
5, 소요시간: 6시간 40분
6, 시간대 별 구간
08: 11.- 의신마을
08: 41.- 임도
09: 04.- 취수통
09: 38.- 상철굴암 입구
10: 43.- 작전도로
11: 26.- 덕평능선 삼거리
11: 40.- 초막터 입구(~ 11: 44.)
11: 57.- 초막터(~ 12: 04.)
12: 16.- 입구(점심~ 12: 27.)
13: 21.- 원통암 삼거리
13: 50.- 언통암(~13: 59.)
14: 52.- 의신마을
7, 산행소묘
오늘도 화개골 언저리 산행입니다.
마을 뒤로 오르면 맨 앞의 낮은 덕평봉능선, 그 뒤로 남부능선에서 내려오는 단천지능, 지네능선이 가로지릅니다.
오늘의 목적은 지난 벽소령에서 만난 도솔산인님이 초막터에 간다고 해서 저도 예전에 두어 번 가본 곳이라
다시 찾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길이 뚜렷했는데 이제 마을 주민들도 잘 다니지 않아 많이 묵었습니다.
마을 뒤로 돌아 오르면 취수 파이프가 터져 아까운 물이 새고 있습니다.
08: 41. 임도 올라서기 직전 두 번째!
임도는 취수장까지 수평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나중에 하산하여 마을 주민에게 알리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귀가를 서두르느라 까맣게
까묵었습니다.
혹시 정대장이나 주민 아는 분 계시면 연락 좀 해주세요.
귀한 물이 세 군데나 샌다고.
산수국
09: 04. 작은 계곡의 첫 번째 집수통을 만나고,
09: 11. 이어서 큰 계곡의 두 번째 집수통을 만나 계곡을 건넙니다.
중철굴암에서 넘어와 상철굴암 입구에 닿으면 숯가마터가 있습니다.
상철굴암 입구, 본격적으로 능선에 붙는 곳에서 꼭대님이 반깁니다.
싸리꽃
오토바이능선에 올라 잠시 진행하는데 앞쪽에서 인기척이 들립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길이라 예상치 못해 잠시 놀라며 물으니 길을 잃어 내려간다고 하네요.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데,
저어기 강..... 아는 체합니다.
예, 강 모입니다.
저 반야봉입니다. 아, 여수의 반야봉!
예전에 취운님 살았을 적에 전남동부팀과 산행도 많이 하고 번개모임에도 자주 가서
알았던 분입니다.
여수의 [반야봉] 님입니다.
저보고 형님 아직 그대로이시네요. 합니다.
실은 많이 늙었는데.... 저보다 다섯 살 아래입니다.
귀한 인연을 뒤로 하고 다시 진행합니다.
오토바이
나는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도시의 집들 사이로 아이들과 자동차를 피해가며
달리는 것에 이미 지쳐버린 지 오래이다
나는 거친 들판을 사막을 빙하의 골짜기를
상처받은 마음들이 지어내는 헛웃음 속을
거침없이 달려가 부서지고 싶다
허공을 가로질러 큰 산을 뛰어넘어
아직도 살아 떠도는 영혼들을 만나고 싶다
어디 구천(九泉)에라도 다다라서
젊은 그들의 못다한 사랑에 나를 보태고 싶다
(이런 꿈을 실현시킨 오토바이 한 대 지리산 높은 곳 선비샘 아래
산죽밭에 아름답게 쳐박혀 있었습니다)
- 이 성 부 -
아래 지도 붉은 색의 (오토바이능선) 구간 능선 오른쪽 아래에 90년대 중반까지
효성스즈끼 오토바이 한 대가 있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지요.
산악바이크를 즐기다가 연료가 떨어졌든지 고장이 나 버렸든지.....
해서 능선 이름이 그렇게 불리웠습니다.
10: 43. 작전도로 입구를 지나고,
헛갈리는 조림지 구간을 지나 펑퍼짐한 사면이 나오면 길은 유순해집니다.
덕평능선 삼거리 가기 직전 초막터로 바로 들어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삼거리로 진행합니다.
지도를 보면 거의 수평이고 거리도 150미터 정도로 짧아 들어가도 별 어려움은 없어보이는데......
꽃송이버섯
딱 요만 한 놈 두 개를 봤습니다.
몇 년 전에는 제법 컸었는데 올해 많이 가물어 개체수도 적고 크기도 덜 큰 모양입니다.
11: 26. 이 사진을 찍고 의령의 솔바우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해하면서 무심코 걸었는데,
조금 진행하다가 보니 덕평봉으로 진행하고 있네요.
아차! 오늘은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내려가야하는데, 쩝.
표지기 걸린 곳이 삼거리인데 그냥 직진했으니 괜한 헛품만 팔았습니다. ㅋ
11: 33. 다시 삼거리로 내려와 내려갑니다.
11: 40. 전 번 벽소령에서 만난 광주의 연하산방님 표지기 걸린 곳 조금 위쪽이 초막터 들머리입니다.
들머리, 표지기 조금 아래에 조망처가 있습니다.
단천지능, 지네능선이 내려가고,
섬진강 건너 억불봉, 백운산, 한재, 취운이 잠든 또아리봉, 도솔봉이 이어집니다.
영신봉에서 남부능선이 내려가고,
능선 너머 촛대봉과 장군봉(시루봉)이 숨바꼭질하듯 숨었습니다.
여기 여러 번 왔었는데 사람 심리가 표지기만 보고
11: 44. 불쑥 오른쪽으로 들어가니 길이 아니네요.
11: 57. 초막터입니다.
옛날 사람이 살았던 초막이 있었는데 공단에서 철거를 했는지 그야말로 빈 터입니다.
오른쪽 이끼 잔뜩 낀 바위에 각자가 있습니다.
얼마전 몇 번 내린 비로 수량은 사람 한 사람 먹을 만큼은 되겠습니다.
[천우동 경태 임오춘] 까니는 겨우 읽을 수 있겠는데
맨 왼쪽 [이청련서]는 희미합니다.
이것도 물을 끼얹어 찍은 것이고요.
아래 13년 전보다 왼쪽 아래의 이끼는 글자 판독하는라 누가 떼어낸 것 같습니다.
위는 2,009년 5월 5일찍은 것입니다.
조금 읽기가 낫나요?
550년의 풍상에 이만큼 남은 것도 다행입니다.
2,009년에는 이랬습니다.
2,009년 5월 5일 낮 12시 기온은 23도이네요.
양철 지붕 아래 흙바람벽 안에 가재도구가 뒹굴고.....
누가 도를 닦으려고 들어왔던가?
그날 전남동부팀과 산행을 했네요.
배재길님과 저.
저 때만 해도 아직 주름도 잡히지 않고 팽팽했네요. ㅎ
진주교대 곽재용 교수가 쓴 [지리산 청학동]이라는 책에 2,009년도 [천우동] 제 각자 사진을 인용하고 책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달랑 사진 한 장에 책 한 권이라니. 참 고마웠습니다.
청학동은 三災不入之地로 흉년과 전쟁, 질병이 없는 땅을 일컫습니다.
즉, 살기가 좋은 땅이지요.
우리나라 전국에 청학이라는 마을 이름이 많고 학동이라는 이름은 더 많습니다.
옛 문헌에 나타난 지리산 청학동이 여러 군데 있는데
화개면 불일암 부근, 악양면 매계리 청학사 골짜기, 세석평전, 청암면 청학동, 등인데
그 중 한 곳이 덕평이랍니다.
아까 올라왔던 오토바이능선 위쪽 작전도로가 꺾이는 부근이 옛 덕평마을이 있었고,
덕평봉 아래 습지 부근도 사람이 살았다고 합니다.
" 지리산은 구불구불한 줄기가 넓고, 골짜기들이 깊은데, 이른바 천왕봉, 반야봉의 두 봉우리가 가장 높은 곳인데
동쪼과 서쪼에서 마주보고 서서 거리가 1백여 리가 되며, 그 사이에 취령이 있고,
취령 에서 동쪽으로 천왕봉에 이르기가지도 도함 6,70리가 됩니다.
이 봉우리 근처가 바로 문광겸이 말하바 신선이 산다는 선운인데....."
[조선왕조실록 정조9년 을사]
여기서 취령(벽소령) 6,70리라면 선비샘 부근이나 그 아래의 덕평 평전으로 보인다.
[天羽洞] 각자가 청학동이라고 본답니다.
위 곽재용 [지리산 청학동]에서 발췌
12: 16. 다시 입구로 나왔습니다.
들머리는 좌우 나무에 이끈이 묶여 있습니다.
조망처에서 잠시 요기를 하고,
12: 27. 본격적으로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13: 21. 원통암 삼거리에 닿았습니다.
우회전하여 내려갑니다.
13: 50. 원통암으로 들어섭니다.
휴정 서산대사의 출가지이며 수행한 절집이랍니다.
지금부터 500년 전인데 세수 85세까지 살았으면 신선이 될 연세입니다.
볼 때마다 아주 정갈한 모습의 원통암입니다.
" 지리산의 명당에서 기도 정진하여 도를 얻게 되고 , 곧 신통력과 산의 영기를 지니게 된 인물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휴정 서산대사이다.
서산대사는 의신골의 삼철굴과 원통사 등지에서 참선 수행하여 득도, 훗날 승병을 일으켜 왜병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건졌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의 부름을 받는다.
그는 손수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말했다.
서산대사는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대사는 문도 1,500명의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서산대사에게 팔도선교종도총섭이란 직함을 내렸으나,
그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사명대사)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그는 또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을 나아가 어가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서산대사가 왜병들의 침입을 물리칠 때는 신통력을 발휘하였다는 수많은 일화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사실 여부보다 대사가 승병을 일으켜 막강한 세력의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낸 것만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전국의 사찰에 보낸 격문이 추상 같았다. "
기묘년이면 1,939년 1,999년인데.....
서산대사 영정을 모신 청허당
' 서라, 일어나라, 나오라, 때는 왔다.
나라를 위하여 싸울 때가 왔다.
죽음으로서 나라를 건져야 한다.
민족을 살려야 한다.
이 때를 당하여 구차하게 살려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
살기만 도모하면 죽음이 있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 길이 터지는 법이다.
나의 사랑하는 승도여, 일어나라. 불도여, 일어나라........
주야 공부가 생사를 초월한다는 공부였으나 겁날 것이 무엇이며,
혈혈단신에 걸릴 것이 없는 홀홀단신이거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 서산대사는 불교를 일으켜 세운 큰 인물일 뿐 아니라 국난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한 위인이다.
그가 이처럼 국가에 기여한 데는 지리산의 명당에서 수행 정진한 것이 그 근본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흔히들 서산대사라면 묘향산이나 금강산을 떠올리며 지리산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제로 묘향산의 수충사, 밀양의 표충사에서 대사에게 제향을 올리고 있고, 해남의
대흥사에는 표충사와 별도로 대사의 유품 전시관이 있다.
지리산에는 서산대사의 기념관은 고사하고 비석 하나 없으며 그가 머물었던 사암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서산대사와 지리산은 뗄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최화수 기자의 글 인용. -
안에 석간수가 제법 모였습니다.
절집의 채마밭
가지, 풋고추, 깻잎, 쑥갓, 상추, .... 갖가지 채소를 심었네요.
13: 59. 원통암을 뒤로 하고 내려갑니다.
왕원추리
지나온 덕평능선
능소화
가운데 도덕봉
오늘 바빠 지나쳤는데 도덕봉 조망 보러 한 번 가야겠습니다.
장마에 중부지방은 물난리가 났는데,
남부지방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이 하절에 건강에 유의하시고,
읽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琴 農 姜 鎬 元 拜 上
이번주도 화개에 들러셨군요~
전오늘 한신지계곡 산행했습니다 물이많아 좀 힘들었네요. 같이간 지인 누님은 어제 대성폭포로 영신대 거쳐서 오토바이능선으로 내려왔다고 하던데
혹시 마주치지않았나요? 이누님도 지리비탐에 3년전부터 빠지셔서 열정이 대단하네요 ㅎ
점빵 누님께 가시면 차한잔드리라구 말씀드렸는데 ㅎ 담엔 들리시죠~ 점빵이지만 사랑방이죠
아니면 7월16일쯤 화개서 같이 산행을 ㅎ
화개명차 김동곤명인께서 화개역사문화에 관심이 많죠~ 사촌누님도 관심이 좀 있구요~
그리고 쌍계국민학교 출신으로 청학동이 불일암 근처이길 바래봅니다
http://v.media.daum.net/v/20180510121219921
몇해전 완폭대가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산행기 잘봤습니다
내일 일과시간에 정독하겠습니다 ㅎ
2, 같이간 지인 누님은 철각입니다.
의신- 대성폭포- 영신대- 칠선봉- 덕평봉- 오토바이능선- 의신 원점회귀이면 상당한 거리이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난이도도 높아 당일로는 힘든 코스인데 이틀 연속 산행을 하셨네요.
오토바이능선을 저는 오전에 올랐고 지인은 오후에 내려왔을 겁니다.
3, 당연히 쌩나드리점빵에 들렸습니다.
막걸리, 커피, 음료를 샀지요,
제 얼굴 익히시라꼬 일부러 마스크 벗고 들어갔는데 단 번에 아! 전에 오셨던 분!
하고 알아보아 기뻤습니다. ㅎ
4, 불일폭포 부근이 청학동이라는 이야기가 옛날부터 전해왔습니다.
5,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