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봄의 막바지인 오월 이십일,
젊을 때 같으면 지리산 한 바리 하고 오후에 롯지로 갑니다만
느지막히 집을 나섭니다.
먼저 산청군 신등면 둔철산 자락에 있는 정취암으로 갑니다.
매발톱
노랑붓꽃
붓꽃
정취암
작약
자주달개비
법당에 법문을 듣는다고 많이 앉았습니다.
소원을 담았습니다.(대구 소원님 아님)
불탄일을 일 주일 앞두고 불자들이 많이 왔습니다.
함양으로 이동하여 점심요기를 하고 상림으로 갑니다.
화창한 주말을 맞아 나들이객이 많습니다.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 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치마저고리는 아니지만 그네 한 번 탑니다.
할매 할배가 꽃양귀비 속에
쉬면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휴대폰 들여다 보는 게 일상인데,
책을 읽는 귀한 모습을 봅니다.
지리산 롯지를 향해 출바알~~~~
구불구불 지안재를 차량이 오르내립니다.
오도재에서 본 함양 거창의 산군
오른쪽에 함양읍이 보이네요.
노부부가 다리쉼을 합니다.
전망대에서 본 지리산
하봉, 중봉은 보이는데 상봉은 구름모자를 썼고,
오른쪽으로 제석봉, 장터목,연하봉,촛대봉, 영신봉,.... 주능이 가로지릅니다.
왼쪽 가운데 창암산, 오른쪽으로 금대산, 백운산
백운산 아래 창원마을에 지리산롯지가 있습니다.
조선조 초의 문신인 강희맹 할아버지의 시비입니다.
단속사 지 정당매 주인공인 통정공 강회백의 손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 강희안(姜希顔)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47년(세종 29) 24세로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 예조좌랑과 돈녕판관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3등,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이듬해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그해에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이조판서·판돈녕부사·우찬성을 역임한 뒤, 1482년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해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또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던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했다.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강희맹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衿陽雜錄)』·『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희맹 [姜希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면암 최익현의 시비
3시 반쯤 지리산롯지에 도착하니 행사 진행본부 요원도 막 도착하여
등록 준비도 하고 중고품 거래 장터도 펼칩니다.
중부경남팀에서 준비를 합니다.,
오른쪽에 옆집 진주팀의 조장 유키, 키서방도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진주팀에서는 벌써 술잔이 오갑니다.
진주아재님께서 한 잔 하고 가라고 부릅니다.
뒤돌아보는 [웅이]님 박종웅, 서서 일하는 키서방, 고기 굽는 객꾼과 앞에 뽓때
그 오른쪽으로 산으로, 심마니, 해영, 목가님
녹색 상의의 최정석
다른 팀들은 제가 방문해서 슬과 안주만 거하게 얻어 묵고 정작 사진은 못 찍어 죄송합니다.
백산님 사진 참조해주세요.
금농 강호원의 수상소감 재방송입니다.
저의 수상소감이 마지막이 될지 몰라 간략한 소회를 말씀드림.
1,969년부터 근교산을 다니다가
1,970년10월초 중산리- 화엄사 종주로 지리산과 인연
지리99 창립- 2,003년 8월, 올해 창립 20주년
저의 지리99 가입- 2,004년, 1년간 눈팅회원.
산행기- 2,005년부터 쓰기시작 2,006년부터 2,023년까지 18회째 이어옴
그동안 산행기 년 30편내외 500여 편, 다방 글 400여 편 합계 900여 편을 올렸음
그 이전 기록은 없어 모름.
지리99 가입 전에는 종이지도와 최화수 선생의 책을 길잡이로 혼자서
지리산 골골 능선을 헤집고 다니다가
지리99를 통해 수도권, 대전.충청, 광주, 대구, 부산, 울산, 진주, 전남동부팀,
그리고 탐구팀을 알게 되었고
탐구팀의 좌장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지리산꾼, 그리고 지리산학의 학자이신
가객 류정자 선생님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여러 지리산꾼과 교유에 감사.
지리산을 사랑하는 후배들이 많고 치열한 산행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어 다행이고 고맙게 생각.
그동안 저에게 과분한 사랑을 주신 지리99 가족 여러분께 고마움
부족한 저에게 고희연 등 선배 예우를 해준 제 속지인 중부경님팀에 감사
늘그막에 금농 호를 지어주신 엉겅퀴 이재구 선생께 고마움
琴 農 說 - 짐짓 옛사람의 어투를 흉내내어
어느날 강호원 선배가 나에게 호를 지어 주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나이 들어가면서 이름 부르기도 뭣하고 해서 호를 지으려 하는데, 그대가 옛일에 좀 밝으니 하나 지어 주시게나.
울림이 좋은 것으로~~”
하였다.
나는 강호원 선배를 모른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의 호를 짓겠는가?
그는 함안에서 태어나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학교와 직장생활은 물론 퇴직 후에도 고향에 눌러 살며, 고희(古稀)에
가까운 나이에도 지극한 효도로 노모를 모시고 사는 그는, 드물게도 옛사람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산을 좋아하며, 무엇보다도 사람을 좋아한다.
또한 그는 스스로 족함을 알아 늘 그의 정신은 자유롭고 그의 삶은 유쾌하다. 사람의 향기와 울림은 천 리를 간다 했으니,
나는 그를 모르지만 이로써 세상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연이 닿으면 만나게 되고 뜻이 통하면 벗이 되는 법. 넓은 세상 수없이 긴 시간 중에 같은 시대, 영혼 깊숙히 사랑하는
지리산에서 만났으니 이 어찌 우연이랴? 그래서 나는 「금천(琴川)가에서 농사지으며[農], 거문고[琴]를 안고
한가하게 늙어가는, 금슬(琴瑟) 좋은 부부」를 그리며, 號를『금농(琴農)』이라 지으려 한다.
옛사람들은 所處以號라 하여 인연 있는 곳의 지명에서 호를 많이 따왔으니 나도 그가 사는 비봉산 아래 북촌의 금천(琴川)
에서 琴을 취하고, 또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라 했으니 고향에 뿌리내려 근본을 잘 지키고 있는 데에서 農을 취하였다.
허리 굽혀 논밭에서 일하는 것만 농사랴? 뿌리고 거두는 일이 모두 농사라면 그의 효성과 자녀농사 행복전도,
이만하면 그를 훌륭한 농사꾼이라 일컬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거문고의 맑은 울림처럼 주변을 즐겁게 만들고 있으니 그는 이미 금농(琴農)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거문고처럼 아름다운 소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행복한 농사꾼으로 사는 모습을 오래도록 보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이에 琴農說을 쓴다.
2014년 늦가을, 후배 이재구 拜
글씨는 제 친구 송계 한혁구 선생이 이재구 선생의 호설을 보고
을미 정월( 2,015년) 썼습니다.
금 농 비봉산하 유락금, 효제인의 수향농
지리n보이님이 언급한 2,020년 57 산행기는 지리 입산 50주년이라
그 이전 기록인 2,016년 52 산행기에 작심하고 일흔한 살에 도전해봤음
체격조건이나 체력이 뛰어나지 못한 제가 벼텨온 것은 꾸준함이었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운동, 토요일 산행, 일요일 교회 출석
이제 지리99에서 저의 역할도 다해감
당초 일흔까지 지리산에 드는 것이 목표였으나 일흔 중반이니 초과
더 많은 지리산꾼들이 지리99의 동력이자 존재 이유인
산행기 작성 전통을 이어가기바람
18회 연속으로 상을 받았으니 지리99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제 수상소감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2,025년까지 20회만 이어가기를 희망
응급처치 강의, 산행기상 수상 사진도 엄꼬,
가리늦가 정신을 채려
청탁불문, 발통님의 개근상 수상 소감!
행님들,
기념 사진이 없어가 됩니까? 백곰님의 유연한 폼.
지리99의 대표 미남이자 명 사회자 뽓때 장선생.
편안한 자세로 수상소감을 듣습니다.
정대헌은 즐겁고, 명지는 기쁘고, 초오는 이불 덮고 눴습니다.
올해 운영진에 합류한 [수야], 심재수님의 각오!
지리n보이님의 산행기 작성 당부말씀
특히 왕년에 지리99 산행기의 명 작가 유키님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이렇게 저녁 8시 30분에 공식행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친교의 시간을 갖습니다.
행사 전 두시간 마신데다가 더하기 네 시간을 마셨으니......
11시까지 지리99의 젊은 피들인 웅이, 시루, 하주, 레테님과
진주의 목가님이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버리고
마지막에 레테, 산거북이님과 또 달립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늙은이 자지 않고 앉아 있는 걸 위로한다꼬
유키, 이명숙, 시루지기님이 합석했습니다.
노래는 산거북이가 예닐 곱 곡 뽑았고, 장사익에 버금가는 레테님의 절창도.
이렇게해서 지리산롯지의 우정과 화합의,
아름다운 산정무한의 밤은 깊어갔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추억이 오롯이 쌓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참 반가웠고 즐거웠습니다.
앞으로 22년 후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지만 레테님은 저보다 훨씬 뛰어난
훌륭한 지리산꾼으로 자리매김해 있을 겁니다.
저 하늘에서 김동현 어르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어제 모처럼 마이 마셨습니다.
보통 11시에 철수하는데,
4년 모가치 한 빵에 해결하느라.ㅋ
귀가 때 운전이 좀 힘들데예.
고맙습니다.
참, 남은 막걸리 반 말 넘게 가져와 됫병에 분해 김치냉장고에 넣는다고 아내에게 지청구깨나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도 진영 막걸리 맛 좀 보자 하데예.ㅋ
첫모임에 참석했는데 선배님과 하주 보이형님의
언급에 핫가이?가 되어있더군요!
감사합니다.
선배님을 비롯하여 진주선배님 그리고
보고싶은 선배님을 뵈어서 좋았습니다~
선배님의 발자취는 대단하시고
존경 받을만 하십니다.존경합니다
제가11시경 도망을 갔었나봅니다.
바로 잠자리에 들었는지 모르겠네요!!
다행이 잠자리에 잘 찾아가서 자고 있었네요.
5시경 깨어서 그때서야 침낭을 덮었네요!!
선배님은 그후로도 달리셨다니
지리산 발자취보다도 더 대단하십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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