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목: 법화산
2, 언제: 2,024. 5.15.(수, 맑음)
3, 누구와: 혼자서
4, 코스: 문상마을- 법화산우능- 법화산- 법화산좌능- 법화사- 문상마을(약 7.7km)
5, 소요시간: 5시간 15분
6, 시간대 별 구간
07: 36.- 문상마을
08: 14.- 억년대(~ 08: 24.)
08: 42.- 임도
09: 19.- 삼거리
10: 20.- 법화산
10: 30.- 삼거리
11: 24.- 법화사(~ 11: 30.)
11: 55.- 도로(~ 12: 14.)
12: 45.- 문상마을
7, 산행소묘
요즈음 날씨가 산행하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아침에 서늘해 오름길에 땀이 많이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강은 푸르고 하늘도 파랗습니다.
보스님의 시댁이 있는, 장항마을 건너편에서 본 중봉과 써리봉
오른쪽으로 상내봉과 독바위, 그 아래 솔봉
07: 36. 문상마을에서 출발합니다.
문헌정을 왼쪽으로 오릅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가운데 보이는 내막재에서 능선을 타고 올라도 되는데,
지난 번 가 본 억년대를 거쳐 오르기로 합니다.
엉겅퀴 이선생 손님이 왔어요~~~~
작약
왼쪽 우뚝 솟은 상내봉삼거리에서 상내봉 거쳐 능선이 내려갑니다.
그 앞은 솔봉능선,
뒤에 중봉, 하봉, 초암능선
꿀풀
청초 우거진 골에
- 임제 -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쳣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임제(林悌,1549~1587)
본관 나주. 자 자순(子順). 호 백호(白湖)·겸재(謙齋).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문인.
1576년(선조 9)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급제,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동서(東西)의 당파싸움을 개탄,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냈다.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황진이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와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한 시조 〈한우가(寒雨歌)〉 등은 유명하다.
저서에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임백호집(林白湖集)》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이 있다.
(두산백과)
찔레꽃
위 시조는 임제가 술을 매개로 황진이(1506~ 1567) 무덤에 들려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푸른 풀만 수북이 자란 골짜기에 자는지 그냥 누웠는지,
젊은 날의 고왔던 얼굴은 어디 두고 백골로 누워 있느냐.
이제는 잔 잡아 술을 권해 줄 이가 없으니 그것을 설워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청초, 홍안, 백골의 시각적 이미지를 통한 대조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초, 중장은 설의법으로 인생의 무상감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
평안도 평사로 가는 도중에 송도 황진이 무덤에 들려 슬퍼한 것으로 이 일로 인해 파직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評事(평사)
신라시대에는 감찰 및 형옥(刑獄) 관계의 일을 담당한 관직이다.
651년(진덕여왕 5) 설치하여 형사사무를 관장하던 좌이방부(左理方府)와 659년(무열왕 6) 설치하여
규탄업무(糾彈業務)를 맡아보던 사정부(司正府)에 딸려 있던 관직으로 위계는 대나마(大奈麻:10등관)에서 나마(奈麻:11등관)까지였으며
정원은 좌이방부 ·사정부에 각 2명을 두었다. 후에 좌(佐)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각 1명씩 두었던 정6품의 무관직으로
1466년(세조 12) 병마도사(兵馬都事)를 고친 이름인데 병마절도사의 속료(屬僚)로서 개시(開市)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았다.
(두산백과)
황진이(黃眞伊, 1506 ~ 1567)는 조선 중기의 시인, 기녀, 작가, 서예가, 음악가, 무희이다.
중종·명종 때(16세기 초, 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인 명월(明月)로도 알려져 있다.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 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1]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 《박연폭포시》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 위키백과 -
08: 14. 억년대는 잡목으로 뒤덮였습니다.
이억년
고려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에 거주한 문신.
가계
이억년은 고려 후기 세족가문인 성주(星州) 이씨이다. 이억년의 처음 이름은 이영(李永), 자는 인여(仁汝), 호는 요산재(樂山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돈문(李敦文), 할아버지는 이득희(李得禧)이다.
아버지는 경산부(京山府)[경상북도 성주군에 있던 옛 부명]의 향리를 지낸 이장경(李長庚)이다.
어머니는 합천군부인 이씨이다. 이억년의 동생이 이조년(李兆年)[1269~1343)이다.
활동 사항
1285년(충렬왕 11)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충렬왕 때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로 부임하였다.
『고려사』 선거지에 따르면 1285년 4월에 과거가 있었으며, 이 과거는 판비서사 안전(安戩)[?~1298]이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억년의 과거 급제 기록은 조선 후기의 비명과 족보에 전하고 있어 추가 논증을 필요로 한다.
이후 이억년은 함양으로 낙향하여 당시 원나라가 국정에 간섭하는 등 관여하자 원나라의 개입을 항의하는 시를 남겼다고 전하여진다.
“생각지도 않은 10년의 벼슬살이[천재홍진몽외사(千載紅塵夢外事)] 청산 어디메쯤 홀로 머물까[청산하처독엄비(靑山何處獨掩扉)]”.
이억년의 낙향은 충렬왕과 충선왕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298년(충렬왕 24) 이후 고려 조정이 충렬왕파와 충선왕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울 때 이조년은 충렬왕 측에 가담하고
이후 충선왕이 권력을 잡자 유배되었는데 이억년 역시 이때 유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억년은 경상남도 함양군 위성(渭城) 엄천리(嚴川里)[지금의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로 들어가
서당인 도정정사(道正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내었다.
묘소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문정촌 장항(獐項)내 임좌(壬坐)에 있다. (문상 아래 마을 문하)
[네이버 지식백과]
08: 42. 임도로 올라섰습니다.
전에도 언급하였지만 중시조가 특이합니다.
보통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무슨 대군파 등인데,
취옹공파라......
나도 술을 좋아하는데 이 양반도 평생 술을 즐겼나 봅니다.
生也 一片 浮雲起(생야 일편 부운기요) 死也一片浮雲滅(사야 일편 부운멸)이니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읾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니)
어차피 醉生夢死(취생몽사)가 인생길입니다.
내막재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고,
싱그러운 솔밭길을 오릅니다.
둥글레
오래 전에 독오당에서 올랐던 모양입니다.
더부살이
인생이 별 거이 있습니까? 전세 아니모 월세지 머!
목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이번에는 잘 크지 않는 가지에다 매었네요.
09: 19. 능선 삼거리에 올랐습니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내려가면 잔닥재, 활인산, 당두재, 베리산 거쳐
지곡마을의 유키 자매 모교인 화남초등학교(폐교)로 떨어집니다.
좌회전하여 진행합니다.
신록은 안구를 정화합니다.
10: 05. 이번 산행의 처음이자 마지막 조망이 트이는 곳입니다.
엄천이 감돌아 내려가고, 정면의 왕산과 오른쪽 멀리 웅석봉
조금 당겨서
중간 능선 오른쪽이 왕등습지 위 봉우리, 가운데 고동재
앞은 함양과 산청을 가르는 군계능선이 내려갑니다.
올라온 능선
오른쪽 멀리 황매산
오른쪽에 상, 중, 하봉이 거의 겹쳐서 보입니다.
가파른 산길이 이어집니다.
장딴지 힘깨나 주고 오르면,
10: 20. 법화산입니다.
조망이 없는 봉우리라 바로 내려섭니다.
步生臥死(보생와사,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송신탑에 세워진 이정목은 낡아 다 부서졌습니다.
이 탑 지나면 바로 법화산좌능 갈림길입니다.
10: 30. 좌회전하여 내립니다.
최근에 이장한 흔적입니다.
옛날에는 명당 찾아 이 정도 높이에 산소를 쓴 게 다반사였겠지만
요즈음은 누가 성묘하러 오겠습니까?
당연히 교통 좋고 관리 잘 해주는 추모공원으로 모시는게 잘 한 일입니다.
내림길 초반에 순하던 길이 급경사로 바뀝니다.
짧은 거리에 고도를 급격히 낮추려니 등고선이 촘촘해집니다.
겹쳐 보이던 하봉, 중봉, 상봉간 간격이 좀 펴졌습니다. ㅎ
가운데 제석봉 오른쪽으로 장터목,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이 이어집니다.
길이 다시 유순해지고 능선을 버리고 법화사 쪽으로 내려갑니다.
절 바로 위에서 대나무밭에 갇힙니다.
긁히고 찔리고 겨우 탈출하니,
11: 24. 법화사 대웅전 바로 밑입니다.
색색의 연등이 걸리고 참배객이 많습니다.
접수도 받고, 음료나 밥도 받고,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
세종대왕 탄신일이자 스승의 날,
그리고 뽓때님과 동갑인 제 막내동생 생일이기도 합니다.
절집에 쓸 고추를 심었습니다.
고지대라 검은 비닐멀칭을 했군요.
절집을 돌아서 도로를 벗어나 다시 산길로 접어듭니다.
사성대 지나 코재에서 다시 능선길을 내려갑니다.
새로 쓴 산소인 것 같습니다.
철망을 만나 바로 옆으로 붙어 내려갑니다.
11: 55. 오른쪽 전봇대 왼쪽으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내리려는데 왼손에 있던 스틱이 안 보입니다.
아차, 어디서 걸려 빠졌나?
배낭을 벗고, 오른손 스틱도 놔두고 급하게 다시 올라갑니다.
한 10분 올라 철망 만났던 곳을 조금 더 올라도 안 보입니다.
내려 올 때에 두리번거려도 없습니다.
에이. 다음에 스틱 찾기 산행을 다시 와야겠네, 하며
전봇대에서 다시 내리려는데
아래에서 볼 때 전봇대 오른쪽에 스틱이 떨어져 있습니다.
처음 내리려고 나뭇가지 붙잡고 발로 밟고 할 때 빠져 떨어진 것 같습니다.
한 20분 헛품만 팔았습니다.
12: 14. 도로걷기입니다.
고들빼기
지칭개
호두나무꽃은 오동나무꽃과 색이 닮았습니다.
독일붓꽃은 지금 우리집에도 피었습니다.
오름길에 보았던 풍경이 다시 펼쳐지고....
12: 45. 문상마을 입구 도착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감합니다.
읽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좋은 계절에 산행 많이 하십시오.
오월은 장미의 계절!
琴 農 姜 鎬 元 拜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