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家(출가)
2002년 3월...
태어나 20년을 살아온 함안을 떠나 경북 경산에서 대학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던 학교와 학과는 아니었지만 재수보단 대학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그 시절 제 꿈은 체육교사였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체대입시학원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체력의 한계를 뛰어 넘기엔 너무도 부족한 시간이었고
1년 이상씩 준비를 해온 체대 입시생들을 이긴다는건 사실상 불가능 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맛본 패배의 쓴잔... 그렇지만 그 때의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되어서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기억하는 대학 새내기의 1년은 그 어떤 해보다
즐겁고 추억이 많은 한해 였습니다.
入隊(입대)
2003년 3월 13일
마산역 앞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입대버스를 타고 다시금 고향을 떠났습니다.
버스가 눈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끝까지 쳐다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진
않으셨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을 어머니입니다.
6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4주간의 후반기 교육을 거쳐 강원도 고성에 자대를
배치 받았습니다. 내심 고향과 가까운 곳에 배치를 받기를 기대했었던 터라
처음엔 낙심도 많이 되고 눈물도 많이 나곤 했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갈수록
군생활에 적응을 해나갔고 부대에서 인정받는 사병이 되었습니다.
야간 근무를 나갈 때면 쏟아지듯이 수많았던 별들이 너무 좋았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마음속 소원을 빌어보곤 했었던 그곳에서의 생활이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렇게 2년여의 군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復學(복학)
2005년 4월
군 제대 이후 복학하기 전까지 10개월동안 가스충전소에서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정용 프로판 가스를 배달을 하기도 하고 차량용 부탄 가스를 충전하는 일도 겸했습니다.
첫 사회생활을 현장에서 직접 뛰며 일하는 것이 조금은 힘들기도 했었지만
할머니께 한달에 한번씩 용돈 드리는 일이 저에겐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2006년 3월
복학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 하나를 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벌어서 생활하자 집에는 손벌리지 말자”
물론 대학 4년동안 부모님께서 등록금을 많이 보태어 주셨지만 매 학기 방학마다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고 PC조립 아르바이트로도 생활비를
충분히 벌수가 있었습니다. 복학 첫해 성적우수 전액 장학금을 받았을 때가 대학 생활중
가장 기억이 많이 남는 순간입니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제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자세하게는 모르십니다.
그냥 인테리어 리모델링 하는 업체에서 방학마다 보조업무를 담당했던 정도로만
알고 계십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하루 5~6만원짜리 흔히들 말하는 노가다 잡부일도
많이 했었지만 철거현장에서 하루 18만원짜리 일도 해봤고 17시간동안 쉬지 않고
작업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고되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힘들게 일해서 벌은 돈의 가치가 어떠한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就業(취업) 그리고 歸鄕(귀향)
경영학을 전공하였지만 PC에 관해서는 그 어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취업을 그쪽으로 준비를 했었지만 대졸학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얼마 되질 않았습니다.
1년간 30개나 넘는 곳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최종합격까지 받고도 입사가
취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고 이력서를 다시 또
고치고 다듬으면서 취업을 준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전 고향 함안에 있는
건설회사에 사무직으로 취업을 하게 되어 내달 2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7년만에 귀향입니다. 20살 앳된 얼굴로 고향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 이제 다 큰
청년이 되어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매일 먹을 수가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2002년 3월...
태어나 20년을 살아온 함안을 떠나 경북 경산에서 대학생활을 시작 했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던 학교와 학과는 아니었지만 재수보단 대학 진학을 선택했습니다
그 시절 제 꿈은 체육교사였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3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체대입시학원에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체력의 한계를 뛰어 넘기엔 너무도 부족한 시간이었고
1년 이상씩 준비를 해온 체대 입시생들을 이긴다는건 사실상 불가능 했습니다
태어나 처음 맛본 패배의 쓴잔... 그렇지만 그 때의 실패가 좋은 경험이 되어서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기억하는 대학 새내기의 1년은 그 어떤 해보다
즐겁고 추억이 많은 한해 였습니다.
入隊(입대)
2003년 3월 13일
마산역 앞에서 논산으로 향하는 입대버스를 타고 다시금 고향을 떠났습니다.
버스가 눈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끝까지 쳐다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진
않으셨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을 어머니입니다.
6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4주간의 후반기 교육을 거쳐 강원도 고성에 자대를
배치 받았습니다. 내심 고향과 가까운 곳에 배치를 받기를 기대했었던 터라
처음엔 낙심도 많이 되고 눈물도 많이 나곤 했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갈수록
군생활에 적응을 해나갔고 부대에서 인정받는 사병이 되었습니다.
야간 근무를 나갈 때면 쏟아지듯이 수많았던 별들이 너무 좋았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마음속 소원을 빌어보곤 했었던 그곳에서의 생활이 지금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렇게 2년여의 군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復學(복학)
2005년 4월
군 제대 이후 복학하기 전까지 10개월동안 가스충전소에서 일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정용 프로판 가스를 배달을 하기도 하고 차량용 부탄 가스를 충전하는 일도 겸했습니다.
첫 사회생활을 현장에서 직접 뛰며 일하는 것이 조금은 힘들기도 했었지만
할머니께 한달에 한번씩 용돈 드리는 일이 저에겐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2006년 3월
복학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 하나를 했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벌어서 생활하자 집에는 손벌리지 말자”
물론 대학 4년동안 부모님께서 등록금을 많이 보태어 주셨지만 매 학기 방학마다
건설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고 PC조립 아르바이트로도 생활비를
충분히 벌수가 있었습니다. 복학 첫해 성적우수 전액 장학금을 받았을 때가 대학 생활중
가장 기억이 많이 남는 순간입니다.
사실 부모님께서는 제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자세하게는 모르십니다.
그냥 인테리어 리모델링 하는 업체에서 방학마다 보조업무를 담당했던 정도로만
알고 계십니다.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하루 5~6만원짜리 흔히들 말하는 노가다 잡부일도
많이 했었지만 철거현장에서 하루 18만원짜리 일도 해봤고 17시간동안 쉬지 않고
작업을 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고되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때의 경험으로
힘들게 일해서 벌은 돈의 가치가 어떠한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就業(취업) 그리고 歸鄕(귀향)
경영학을 전공하였지만 PC에 관해서는 그 어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에
취업을 그쪽으로 준비를 했었지만 대졸학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얼마 되질 않았습니다.
1년간 30개나 넘는 곳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최종합격까지 받고도 입사가
취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를 하지 않고 이력서를 다시 또
고치고 다듬으면서 취업을 준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전 고향 함안에 있는
건설회사에 사무직으로 취업을 하게 되어 내달 2일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7년만에 귀향입니다. 20살 앳된 얼굴로 고향을 떠났던 작은 아들이 이제 다 큰
청년이 되어 다시 부모님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해주시는 맛있는 밥을 매일 먹을 수가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24 Comments
아버지와 어머니를 골고루 닮은 님의 얼굴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성실함과 선함은 둘째로 치고 가슴에 품은 생각을 보여주는 문장이 반듯하고 깔끔하고 차분하여 님이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아오는 시간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성실하게 보냈는지 다 보입니다. 고향의 부모님 곁에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한창 공부하며 일할 나이이므로 지리산에 빠지는 것은 훗날로 미루되 가끔은 아버지 모시고 지리산을 오르며 사회생활의 고달픔을 푸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슴이 뭉클한 글입니다. 7년만의 귀향 축하드려요. 자식농사는 진주팀 성님들만 잘 짓는 줄 알았는데 호원성님도 진주팀 성님들 못지 않습니다. 저도 군대는 강원도 고성에서 근무를 했던지랴 후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사진에 나온 풍경을 유심히 살펴 봤지만 통 감이 잡히질 않는군요. 어째던, 겨울이 되면 눈이 엄청시리 많이 오는 곳이 그곳이기 하고, 산을 좋아하는 남녁의 사나이들은 설악산자락을 두루 설렵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그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축복받은 사나이들만 가는 곳이 그곳이랍니다...ㅎ. 진주사돈어른께서도 대기 좋아할 것 같은데...
산꾼아들 축하 축하 축하해요 !! 정말 장하네 지리다방에 올려진 글이나 어린양님께 듣는 얘기속에 지리산꾼이 너무 의젖하고 항상 마음에 삶에대한 사랑이 가득하다 싶더니 이렇게 새해초에 부모님과 주위사람을 모두 마음 흐뭇하게 해주니 정말 얘쁘고 믿음직 하고 사랑스런 산꾼아들님 이네 직장생활도 지금까지 처럼 성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밝게 빛나는 행복한 날들만 있길 바랍니다 지금 이순간 어린양 형님이 정말많이 부럽습니다 그동안 심신 고생 많았습니다 많이 행복하시죠 나 사는것만 바빠서 주위에 너무 소홀히 하고 사는것 같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