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선유동계곡

금농 2024. 9. 3. 11:22

1, 제목: 선유동계곡

2, 언제: 2,024. 8. 31.(토, 맑고 무더움)

3, 누구와: 혼자서

4, 코스: 물골고개 입구- 선유동계곡- 사리암 삼거리- 사리암 지- 단천미을- 출발지(약 6.8km)

5, 소요 시간: 5시간 24분

6, 시간대 별 구간

  07: 56.- 물골고개 입구

  08: 17.- 쇠통바위능선

  10: 11.- 계곡 이탈

  10: 23,- 사리암 삼거리

  11: 16.- 사리암 지

  11: 42.- 사리암재

  12: 18.- 독가

  12: 30.- 단천마을

  13: 20.- 출발지

7, 산행소묘

 지난 주 가볍게 한 바리 한다고 나선 것이 산죽과의 씨름에서 한판 패하고 거의 탈진 상태로 

산행을 마쳐 이번에는 더 수월한 코스를 택합니다.

입추, 처서를 다 지났지만 아직 한여름 날씨이기에.

 



07: 56. 노란 표지판이 있는 곳이 물골고개로 오르는 입구입니다.

저기서 왼쪽으로 오르면 사리암지로 가는 최단거리 코스입니다.

 

신흥마을 조금 위 대성교가 선유동계곡 들머리이지만 초소에 항상 차량이 버티고 있어

조금 위의 또 다른 들머리로 내려갑니다.

 



배롱나무

백일 동안 핀다고 백일홍인데 이제 거의 끝물입니다.

 



대성교 조금 위에서 산길을 잡아 오릅니다.

 



잠시 뒤 08: 15. 쇠통바위능선에 올랐습니다.

남부능선 쇠통바위 부근에서 내려오는 능선인데 역시 대성교에서 그 꼬리를 내립니다.

 

왼쪽이 능선길, 오른쪽 사면길이 선유동계곡 가는 길입니다.

 



옛날 신산했던 시절 사람의 흔적입니다.

밭이었거나 집터였거나.

 



큰 호스는 어느 마을에서 쓰는 지 모르지만 상수도용인 것 같고,

 



지금부터 선유동 계곡을 중심으로 좌우로 넘나들며 진행합니다.

출발 때 기온이 21도였고 아직 아침의 계곡길이라 선선합니다.

 



지난 주 내원골보다 수량이 일주일 사이에 많이 줄었습니다.

 



너덜겅도 지나고,

 



아침 햇살을 받은 활엽수는 아직 청춘입니다.

 



潭(담)

 



臥瀑(와폭)

 



小瀑

 



四枝 노각나무

 



선유동계곡은 쇠통바위능선과 지네능선 사이의 아담한 계곡입니다.

칠선계곡, 백무동게곡, 중산리계곡, 뱀사골계곡, 화엄사계곡,....

이름난 계곡보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은 골이지요.

 

신선이 내려와 노닐었다는 이름에 걸맞게 沼, 潭, 瀑(소, 담, 폭)들이 아름답게 펼쳐집니다.

 



단풍철이면 더 아름답겠죠?

 



선유동의 풍경들

 







시원하고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10: 11.

두 시간 남짓 만에 계곡을 벗어납니다.

 



아주 큰 다락논이었던가 .....

 



한 열 층 정도 되는 계단식 묵정밭을 지나면,

 



사람이 기거했던 증거인 대밭이 나오고,

 



10: 23. 사리암 가는 삼거리입니다.

 

직진하여 선유동계곡을 끝까지 오르면 지네능선으로 붙고 조금 더 진행하면 

남부능선 청학봉과 상불재 사이로 오릅니다.

 

다락 묵정밭 위 사면길로 진행합니다.

 



처음에는 성긴 산죽밭 사이로 길이 편안하게 이어집니다.

 



거의 수평 이동인데 굽이 굽이 감돌아 나가는 길이 많이 무너져 내려 

미끄러져 추락하지 않으려고 스틱에 힘도 주고 조심 조심 진행합니다.

땀이 슬슬 나기 시작합니다.

 

위 지도 붉은 점선 길이 물골이 사리암 지에서 90도 꺾여 내려 선유동계곡과 합수합니다.

물골이 가까워졌습니다.

 



이 묵은 폐 골짝에 누가 올 끼라꼬.....

아마 송이나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것 같습니다.

 



출입금지라고 줄을 쳐 놓으면 되돌아 간답니까? ㅎ

 



???

 



이끼

 



11: 06. 물골입니다.

 



물골 바로 옆에 축대가 쌓였고,

대밭이 사리암 지입니다.

 



아래는 2,009년 4월 가객님의 글입니다. (지리박물관- 지리산 폐사지)

 

보리암과 사리암은 이 땅에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에 지리산 화개골에 있었던 절집이다.
두 사찰의 정확한 청건연대와 폐사 시기는 알 수가 없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보리암 옛터, 사리암 옛터라고 등재한 것을 보면 두 곳의 절집들은 조선시대 초기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폐사한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사찰 들이다.

보리암터는 지금의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 모암마을 일대이다.
모암마을의 지명어원을 하동군지에서는 “주민들은 보리암으로 부르고 하동군 전지도(田址圖)에는 牟岩(모암)으로 표기되어있다. 

보리(麥)와는 상관이 없음에도 보리모를 쓰서 모암(牟岩) 또는 맥전(麥田)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이곳에 예전에 보리암(菩提庵) 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동군지의 소개 그대로 마을의 토착주민들은 지금도 마을이름을 보리암으로 부르고 있으나 오랜 세월의 부침 속에 잠겨버린 

보리암 절집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주민들은 한 결 같이 땅을 파면 군데군데 기왓장들이 나온다고만 한다.

사리암터는 현 단천골의 지류인 물골의 하류에 위치한 폐사지로서 지형도에 사리암으로 표기가 되어져 있는 곳이다.

마을 이름의 변경과 함께 절터의 모습까지 완연한 주거지로 탈바꿈을 한 보리암과는 달리, 

사리암은 절집의 자리에 길길이 자란 왕대나무가 차지하고 있어 어느 곳이 본당인지도 확인조차 어렵지만 

주춧돌이 보이고 돌층계의 흔적이 남아있다.
수천 여 평의 너른 지대에 정교하게 쌓은 축대들이며 오래된 기와와 자기 파편들도 수두룩하게 보이고 부도 1기도 서 있다.
사이사이 고임돌을 끼워서 쌓은 축대들의 흔적은 지금까지 보아온 지리산 폐사지의 축대들 중 가장 거대하고 견고한 모습으로 여러곳 남아있다.

석종형의 부도는 20여 년 전 처음 사리암을 찾았을 때는 분명히 왕대밭 상류 작은 시누대숲 옆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근세에 손을 타서 지금은 무덤가로 옮겨져 있으며, 안타깝게도 부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도 못할 만큼 

각자의 자국만 남아있을 정도로 표면이 말끔하게 세척을 당한듯하다.

 

( 사리암 승탑을 어떻게 위로 옮겼는가?- 꼭대님 답)


-할 일 없는 인간이 쓰러뜨려 아래로 굴려 놓았던 것을, 

[지리99] 탐구팀과 인연이 깊은 순원 스님이 주도하여 몇몇 스님들이 나무를 이용하여 제자리로 올리는 작업 모습이 

언젠가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있었지요.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한편 사리암 터에는 지금부터 30년 전 까지 만해도 두 가구의 민가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었다고 한다.
여느 절집들이 전하는 불교 관련 설화와는 달리 두 절집이 도둑의 소굴이었다고 전하는 실록의 기록을 근거로 

보리암과 사리암의 단편적인 역사를 짚어본다.



사리암 지 (2,009년 사진)


조선조 예종1년(1469)에 형조판서(刑曹判書) 강희맹(姜希孟) 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인 지리산 화개골에 도적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을 임금께 아뢰니, 이에 임금은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좌의정(左議政) 윤자운(尹子雲)등의 대신들을 소집하여 

도적을 체포할 사의(事宜)를 의논하게 되고, 두 도가 합심을 하여서 도둑들을 꼭 체포하라고 하면서 도둑들의 소탕을 위해 관군의 지원은 물론 

그에 따르는 충분한 물자를 지원하라고 교지를 내린다.

한편 도둑들이 활보하는 구례, 하동 등 지리산 주변의 각 군현 마다 “자수하는 자와 도둑에게 협종한 자는 관군이 수금(囚禁)하여 보고하면, 

내가 장차 용서하겠다. 관리와 군인과 백성이 능히 도둑을 체포하는 자는 관직으로 상을 주되, 세 자급을 뛰어 올려 제수하고, 

상을 원하는 자는 면포 1백 필을 주고, 천구(賤口)에게는 천역을 면제하고, 향리와 역자는 역을 면제하는 등 논공(論功)하는 등제(等第)는 

다 적군을 사로잡은 것과 같이 하겠다. 

혹 적과 통모(通謀)하여 관군의 일을 누설(漏洩)하거나, 혹은 도적의 체포를 태만히 하는 자는 마땅히 군법으로써 다스릴 것이니, 

너희들은 각각 살피도록 하라.”고 적힌 임금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방까지 나 붙게 된다.

15세기 초반 지리산에 본거지를 정하고서 주변 관가는 물론 양가의 재물 약취를 일삼으면서 활동을 한 도둑의 괴수는 

전남 무안 사람으로 어부 출신의 장영기(張永己)라는 자이다.

따르는 무리가 일백이 넘었던 장영기는 장건(壯健)하기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지리산 화개골 보리암터에 초옥(草屋) 20여 간을 지어, 

낮에는 집에 모이게 하고 밤이면 모든 도적을 여러 곳으로 나누어 보내어, 불을 지르고 재물을 강탈하기도 했다.

또한 도둑들은 백주에도 거리낌 없이 길 가는 사람을 만나면 즉석에서 죽이고 재물을 탈취하니 사람들이 그의 도당이 오는 것을 보면 

집안 재물을 모두 주어서라도 죽음을 모면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모은 그의 의물(儀物)이 재상(宰相)과 비등하였고, 

꾀가 많고 행동이 하도 재빨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를 알 수가 없었으며, 

구례. 하동 등 인근의 관군(官軍)이 합심을 하여서 뒤를 쫓아도 번번이 실패를 하였다.



이에 당시 경상 절도사 이극균은 대군의 관군을 이끌고 장영기 일당의 소탕을 위해 도적의 산채를 급습을 하니 

도둑들은 어둠을 틈타 이미 도주를 한 후 이었고 19채의 산막과 제단까지 갖추어진 보리암 터에는 그들이 버리고 간 말이 14필이고 

말안장과 견장들이 찢기고 불에 타고 있었다. 이후 관군에게 쫓긴 장영기 일당은 보리암터에서 60리 떨어진 지리산 속 더 깊숙한 골짜기인 

사리암(沙里庵)옛 터전으로 거처를 옮겨서 둔치(屯치. 진)를 친다.

이어서 임금이 바뀌어 성종 대에 이르러서도 장영기의 횡행은 수그러들 줄 모르고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조정에서는 일찍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도원수 都元帥 허종(許琮)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하여 파견을 한다.

허종이 경상절도사 이극균과 합세하여 보병들을 이끌고 도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사리암터의 봉우리들을 포위하자 장영기는 

그의 아내로 하여금 갈고(羯鼓.장구)를 치게 하고, 모든 도둑으로 하여금 봉우리의 아래로 내려가서 관군을 치게 하니 

허종(許琮) 또한 한 도의 병마(兵馬)를 다스리면서도 겁을 먹고 능히 제압하지 못하고, 장영기 를 범과 같이 두려워하여 도둑들의 세력만 

더 커지게 만들어서 허종이 이끄는 경군(京軍)을 괴롭히기에 이른다.

나중에 장영기는 결국 허종의 지략으로 지리산에서 쫓기어 장흥의 바다까지 몰리었다가 

허종과 장흥부사 김순신(金舜臣)이 합세하여 지휘하는 관군에게 잡히어서 처형을 당한다.

지리산 도적 장영기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제하고도 조선의 역량 있는 고서들인 

서거정의 ‘속동문선’. 송시열의 ‘송자대전’.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에도 기록이 되어있으며, 김종직의 ‘유두류록’에도 등장을 한다.

김종직은 지리산 산행도중 창불대에 올라서 화개골을 가리키면서,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고 기록을 했다.

한편1680년 8월에 쌍계사~칠불사를 거쳐 천왕봉을 오른 송광연의 지리산기행물인 ‘두류록’에, "삼신동 가는 길 서편으로 보리(菩提)마을이 있고,

동편으로 미라(彌羅)마을이 있다"고 한 것을 보면 모암(보리암)마을은 장영기 이후 마을이 형성이 되어서 사람이 살게 된 듯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의 모암마을에서는 보리암 절터의 흔적은 물론
도둑 장영기 일당의 소굴 흔적도 찾아보기가 어렵지만, 도둑들이 관군의 습격을 받고서 제2의 진지를 삼았던 단천골 사리암 터 그 곳에 가면 

또 하나의 지리산의 잃어버린 불적과 지리산의 작은 역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사리암 지 바로 위 승탑으로 이동합니다.

 


사리암 승탑

 

 

승탑 상부의 연잎 문양

 

(꼭대님 답글)

잊고 있었는데, 사리암 승탑도 연잎 문양의 관을 쓰고 멋있네요.
많은 경우 승탑의 상부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연잎문양도 더러 보입니다.

 


지네능선 끝자락에 있는 세이정 편액(2,021년 사진)

저 때는 몰랐는데 지난 주 소은암 편액을 보고 생각이 나서 올렸습니다.

거기에는 쌍계사, 도광이라고 썼었지요.

 

경진화춘 도광(지난 주 소개한 소은암의 내외명철을 쓴 도광스님 글씨입니다.)

1,940년은 아니고 2,000년에 쓴 것 같습니다.

 
(꼭대님 답글)

세이정을 처음 지었을 무렵 지네능선을 오르면서 새 정자인지라 무심하게 지나갔는데, 편액 글씨가 나름 준수하네요. 

통상 스님들이 관지에 법호만 남기는데, 본 적 없는 道光, 주변 스님의 법호가 아닌가 합니다.

 


승탑 위 묘지 앞의 지대석

 

(꼭대님 답글)
상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신 석판도 승탑의 지대석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탐구하면서 지리산에 저와 같은 승탑 지대석 여러 보았지요.

승탑 위 사리암재를 바라고 오릅니다.

 


오늘 트랙

 

11: 42. 재에서 푸석한 잔돌 급경사 내리막을 조심조심 내려가니 중간 쯤에서 길이 사라지고 산죽과 잡목이 가로막습니다.

헤치고, 넘고, 기어서 진행하느라 금세 땀 범벅이 됩니다.

 

거기다가, 나뭇가지를 잡는데 왼손가락과 왼팔 안쪽이 연거푸 따끔합니다.

벌에 두 방 쏘였습니다. 오른손으로 휘젓고 급히 탈출합니다.

 

지난 주 산죽에 긁히고 쓸려 팔다리에 회를 친 학습효과로 오늘은 토시를 착용했고,

왼손은 마침 장갑을 껴 벌침이 깊숙이 박히지는 않았나봅니다.

그래도 한참 욱신거리고 간헐적으로 따끔거리고 아프네요.

 

아래 2,021년과 사리암재에서 단천마을 구간 트랙을 비교하면,

 



좌우로 더 비틀거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판 왼쪽으로 치우친 것은 똑 같고.

 


단천지능


12: 18. 독가에 들어서니 무신 외국 사냥개 같은 무지막지한 넘이 짖습니다.

다행이 묶어 놓았네요. 무시라~~~~~

 


범왕능선

 



칡꽃

 



12: 30. 단천마을 아래 단천계곡 물에서 얼굴도 씻고 머리도 감고 땀에 전 윗도리도 헹구어 입습니다.


왼손 검지 첫째 마디 관절 부분에 쏘였습니다.

침이 박히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 벌에 쏘이면 먹는 약이 있어 먹었습니다.

 

제 아내는 벌을 많이 타는 바람에 두어 번 식겁한 적이 있습니다.

십몇 년 전인가 청내골 오름길에 능선 붙기 전에 벌에 쏘였는데 혀가 말리고 전신이 몽롱하였는데 

제가 무식해 되돌아 가지 않고 아픈 사람 데리고 꾸역 꾸역

일출봉으로 올라 촛대봉, 세석- 거림까지 진행하였습니다.

그땐 일행도 여남은 명 되었습니다.

 

그 뒤 치밭목 아래 하산길에서 또 쏘였는데 그땐 임우식선생이 비상약을 갖고 있어 먹고 좀 수월했습니다.

 



단천마을 입구

박달나무 檀을 씁니다.


1,023지방도로 내려서 잠시 아래로 걸어,

13: 20. 출발지 도착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감합니다.

 



가을이 더디 옵니다.

그래도 산꾼은 산에 가야합니다.


읽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琴 農  姜  鎬  元  拜 上

 



할배! 마이 늙었네예~~~~~

모름지기 예쁜 얼굴은 좌우 대칭이라고 하는데......

 

나이 묵으니 모두가 비뚤어집니다.

세상이 비뚤어지니 얼굴도 따라서.

 

 
 6 Comments
일원  09.01 17:18  
이번엔 선유동 계곡으로 납시었습니다.
그늘진 계곡에 자리 잡고 한 잔 하기
좋은 곳이지요~저는 어깨 회전근개 통증으로
돈 주고 벌침 맞는디, 자연산 한 두방은 藥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ㅎㅎ 단풍지절에 한 번
댕겨올까 생각해 봅니다. 션한 산행기 자~알
보았습니다. 늘 안산과 즐산입니다~고맙습니다~~~
강호원  09.01 18:10  
박선생, 요즈음은 제가 혼자 산행할 때는 술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거의 홀산이니 매 번 안 가지고 다닙니다. ㅎ

어깨회전근, 테니스 운동에 필수 근육인데 그 덮개가 파열되면
아예 운동은 몬하는데 아직은 그만하신가 봅니다.
잘 치료하시기 바랍니다.

오래 전에 심원쉼터에서 장사하는 사람에게 무릎에 봉침 한 번 맞았는데
양봉 벌도 억수로 아프던데예.
침이 꿈틀거리면 살을 파고드는 게 보입디다.

이번 쏘인 건 침이 박히지 않아 독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부러 맞지는 않을 겁니다. ㅋ

가을 단풍철에 가볍게 한 바리 하시면 좋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레테  09.02 09:25  
큰 불상사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이 철에는 가급적 훤한길로 다녀야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강호원  09.02 09:43  
그넘의 벌이 장갑 낀 손가락과 토시 낀 팔을 쏘는 바람에 조금 붓고 아프다가 약 묵으니 가라앉았습니다.

제가 묵어가고 사람 안 다니는 길만 골라 다니니 훤한 길과는 거리가 멉니다.ㅎ

고맙습니다.
山용호  59분전  
ㅎㅎ 단천과 선유계곡 그리고 사리암터가 꿈에 나올만큼
궁금하던차였는데..이렇게 때마침
처서 바람처럼 산행기를 올려 주시니 나름 감읍할 따름입니다요...
그나저나 산 벌이 독한데 쏘이셨네요....
앞으론 벌이 보이면 온몸을 벌벌벌~~떨면 벌이 지보다 더 큰 벌인줄 알고 도망갑니다..그리하십시오 ㅎ
진짜 조심조심 안전산행 하세요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선유동과 사리암을 이선생께서 우찌 꿈에도 그리었습니까?
신기합니다.

벌에 따끔 쏘이면 벌벌벌 떠는 게 아니고 잽싸게 번개같이 뛰는 게 상책입니다.
그 자리에 있으모 더 쏘입니다.  ㅋ

조심한다고 벌을 피하는 건 아니고 그냥 운수에 맞겨야지요.
그날 일진입니다.

손가락은 금방 가라앉았는데 팔뚝은 어제부터 가렵기 시작하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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