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연동골

금농 2024. 11. 12. 06:44

1, 제목: 연동골

2, 언제: 2,024. 11. 9,(토, 맑음)

3, 누구와: 혼자서

4, 코스: 칠불사 주차장- 독가- 연동골- 삼거리- 운상선원- 칠불사- 주차장(약 4.9km)
5, 소요시간: 3시간 47분
6, 시간대 별 구간
  08: 12.- 주차장
  08: 34.- 독가
  09: 11.- 계곡 건넘(~ 09: 22.)
  09: 50.- 연동마을(~ 10: 00.)
  10: 20.- 칠불사 삼거리(~ 10: 28.)
  10: 52.- 묘지
  11: 32.- 운상선원
  11: 38.- 대웅전
  11: 59.- 주차장
7, 산행소묘
 시월 마지막 주 벽소령 산행 후 한 주 건너 뛰고 두 주만에 지리에 듭니다.
 

 
08: 12. 칠불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서 출발합니다.


 
고도 600에서 500으로 내립니다.


 
08: 34. 독가는 점점 퇴락해 갑니다.


 
연동골 내려서는 지점에 반가운 얼굴이 인사를 합니다.
지리산 골골 능선 안 다닌 데 없는 천연송님은 표지기를 빨리 삭아 없어지는 재질로 만들어
볼 때마다 거의 삭은 모습인데 이것은 아주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것입니다.
 
두 주 전 이 골을 와서 매달았습니다.
선명하게 나오니 새각시 본 것 처럼 저도 기분이 덩달아 좋습니다. ㅎ
 

아직 볼 만하죠?
 
천연송님이 두 주 전 이곳에 와서 목통골 단풍은 50%다! 라고 일러주는 바람에 혹시나 싶어 왔습니다.
연동골은 매 년 시월 마지막 주에 오는데 올 해는 여름이 너무 길어 단풍도 따라 늦어질 거라고 보고.


 
흐르는 계곡수에 반영된 하늘이 파란 물을 만들었습니다.


 
요 앞 한 이틀 춥다가 오늘은 날이 좋습니다.
출발 때 기온은 7도였는데 금세 따뜻해지니 이마에 땀이 뱁니다.
셔츠를 조금 두꺼운 걸 입은 탓도 있고.


 
고도 500에서 700 사이가 딱 절정입니다.


 

빨갛고,
 
 
단풍은 잎 속의 엽록소가 분해되고, 그 자리에 새로 안토사이안이 생성되기 때문에 일어난다. 
식물의 종류가 달라도 안토사이안은 크리산테민 1종뿐이다. 
식물의 종류마다 단풍 빛깔이 다른 것은 이 홍색소와 공존하고 있는 엽록소나 노란색·갈색의 색소 성분이 양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노랗고,

 

 
 
그리고 안토시아닌 색소를 만들지 못하는 나무는 비교적 안정성이 있는 노란색과 주황색의 카로틴 및 크산토필 색소를 나타내게 되어 
투명한 노랑의 잎으로 변한다. 
또한, 붉은색의 안토시아닌과 노란색의 카로틴이 혼합되면 화려한 주홍색이 되는데 이것은 단풍나무류에서 관찰할 수 있다.
 

아직 푸른 넘도 있고,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인은 온도, 햇빛, 그리고 수분의 공급이다. 
우선 낮과 밤의 온도차가 커야 하지만 영하로 내려가지 않아야 하고 일사량이 많아야 한다. 
 

 


특히 붉은색을 나타내는 안토시아닌은 기온이 서서히 내려가면서 햇빛이 좋을 때 가장 색깔이 좋다. 
습도도 적당히 유지되어야 한다. 또한, 너무 춥고 비가 많이 오면 단풍이 충분히 들기 전에 잎이 떨어지게 되고, 
너무 건조하면 단풍을 보기 전에 잎이 타버려서 산뜻한 단풍을 보기 어렵다.


숯가마 터


 
선지능선 오름길처럼 고도를 조금씩 높여도 계속 해가 떠오릅니다.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계곡과 어우러진 더 좋은 단풍을 볼 수 있지만,
골치기는 늙은넘에게는 위험해 그냥 편한 등로를 따라 오릅니다.
 

 
날씨가 맑아 이 정도만 해도 복 받은 단풍 귀경입니다.


 

토끼봉능선 



바야흐로 연동골은 지금 가을이 절정입니다.


 
09: 50. 蓮洞(연동)마을 터입니다.
이 골 마지막 마을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골을 연동골이라 했지요.
 
지금은 木桶(목통)마을이 마지막 마을이라 언젠가부터 목통골이라 부르지만 저는
어감도 좋은 연동골이라 부릅니다.
 
한데 木通은 어름덩굴의 말린 줄기(한약재로 씀)를 뜻하는데 木桶은 나무 통을 뜻합니다.


 
그 옛날 화개장에서 무거운 장짐 지고 이 골을 따라 화개재를 넘어 뱀사골로 내려갔습니다.
지금이야 차도가 뚫려 목통마을까지 편하게 오르지만,
옛날에는 화개에서 화개재까지 4~50리 길을 걸어 올라야 했습니다.


 
이 새파란 28청춘 철없는(계절 잊은) 녀석은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지면
단풍도 들지 못하고 떨어질 운명입니다.
 
10: 20. 화개재, 칠불사 삼거리에서 물길을 건넙니다.


 
몇 년 전 칠불사에서 화개재- 토끼봉으로 오르려고 여기에 오니까,
전날 내린 호우로 계곡 물이 많이 불어 저는 겁이 나서 도저히 못 건너 되돌아 간 적이 있습니다.
 
제 뒤에 뒤따라 온 칠불사 스님은 이 길이 초행이라 하면서도 나무를 걸치고 하더니 건넌다고 합디다.





 

10: 28. 계곡을 건너 잠시 쉬었다가 능선 사면을 따라 진행합니다.


 
이 구간은 아주 붉은 단풍이 보입니다.
붉다는 한자 표현은 赤, 紅, 朱, 丹,(적, 홍, 주, 단) ....다양하게 많습니다.
 
 
 

색깔 빨강에도 엷고 짙음에 따라 여러 나뉨이 있다. 우리는 빨강을 지칭하는 한자로 홍(紅)을 곧잘 쓴다. 

그러나 비교적 엷은 빨강이다. 고대에는 적(赤)이라는 글자가 먼저 쓰였으나 지금은 엄격하게 나누지 않는다.

그럼에도 엷고 짙음에 따른 순서가 있었다. 

가장 짙은 빨강은 강(絳)이다. 알기 쉽게 적자면 진홍색이다. 

그다음은 주(朱)다. 이 글자 새김은 ‘붉음’이다. 그보다 조금 엷은 빨강이 ‘적’이다. 타오르는 불길이 뿜어내는 색이다.

단(丹)이라는 빨강도 있다. ‘적’보다는 엷고, ‘홍’보다는 짙다. 조금은 흰색을 띠는 빨강이 곧 ‘홍’이다. 

그러나 옛적의 이런 분류는 중국 중세를 넘어서면서 섞인다. 즉 ‘적’이나 ‘단’ ‘홍’이 서로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빨강은 맑고 밝은 ‘양(陽)’의 기운이 가득한 상황을 지칭한다.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면서 기쁨이나 따뜻함을 함께 가리킨다. 

아울러 진정성을 말하는 색깔이다. 그래서 참마음이 곧 적심(赤心)이요, 지극한 정성이 바로 적성(赤誠)이다.

-  유광종 -


 
10: 52, 묘지 전망대입니다.
 


후손이 아직 산소를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여기 전망이 좋은 명당이니 무당 등이 굿이나 치성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


삼도봉과 잘록한 화개재








11: 27. 청굴입니다.


부휴대사승탑
 
부휴 선수(浮休 善修, 1543˜1615)는 성은 김씨, 호는 부휴(浮休)이며 남원 출신이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원주(圓珠)를 받은 태몽을 꾼 뒤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비린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뜬구름 같은 세상, 시끄러우니 저는 장차 출가할 것입니다.”

그 말대로 선수는 20세에 부모의 허락을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신명(信明)의 제자가 됐고, 
그 뒤 부용 영관(芙蓉 靈觀, 1485˜1571)에게 심요를 얻었다. 선수는 서산 휴정과 사형사제로 20세 정도 아랫사람이며, 
사명대사와 동시대 인물이다. 사명 유정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법 형제’처럼 서로를 존중했다. 

그 뒤 덕유산, 가야산, 속리산, 금강산 등지에서 정진하다가 서울로 가서 노수신(盧守愼)의 장서를 7년 동안 읽었다. 
선수는 유불(儒彿)을 넘나들며 여러 책을 섭렵했으며, 글씨도 뛰어났다. 
그는 왕희지체를 익혔는데, 사명대사와 함께 당대의 ‘2난(二難)’이라 불릴 정도였다. 

선사 나이 4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덕유산 초암에 은거하고 있었다. 왜적이 물러났다고 생각하고 도량에 나오자, 
수십 명의 적군이 선사를 둘러쌌다. 왜적이 칼날을 휘두르는데도 선수는 차수(叉手)를 한 채 너무나 의연했다. 
선수의 태연 부동한 모습에 왜적들이 오히려 절을 하고 물러갔다.

부휴 선수가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고 있을 때 명나라 사신 이종성(李宗城)이 찾아왔다. 
사신은 명황제의 왕명을 받고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서책과 함께 바다를 건너려다가 해인사에 들러 선사를 찾은 것이다. 
그는 선사를 한번 보고, 감복받아 며칠 선사 옆에 머물며 법문을 듣고 떠났다. 

얼마 뒤 선수는 무주구천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하루는 <원각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큰 뱀이 나타나 계단 아래에 누워 있었다. 
원각경을 다 독송한 뒤, 뱀에게 가서 한발로 그 꼬리를 밟자 뱀이 머리를 들고 물러났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절하고는 “화상의 경전 독송에 힘입어 이미 고신(苦身)을 여의었습니다”라고 했다. 

선수는 광해군 때, 두류산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의 무고를 받아 제자와 함께 감옥에 투옥됐다. 
선사는 옥에 갇혀서도 의연한 풍모를 잃지 않자, 유생들이 광해군에게 “스님이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며 변호했다. 
광해군은 이 말에 선사를 방면했다. 광해군은 내전으로 선사를 모셔 법문을 듣고, 가사와 염주를 주었다. 

선사는 평생토록 신도들로부터 받은 것을 한 물건도 소지하지 않았고, 어떤 것이든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선사의 기품과 도량이 의연하여 선사를 따르는 자가 7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선수는 72세에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다가 칠불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 해 7월,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4˜1659)에게 법을 전하고, 목욕한 뒤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꿈같은 이 세상 노닐기를 일흔 세 해/ 오늘 아침 이 육신허물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네./ 
고요한 적멸세계, 본래 아무 것도 없거늘/ 보리와 번뇌의 근원처가 어디 있겠는가?” 

법랍 57세, 나이 73세였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운상선원


오른쪽 잘록한 뒷당재


아자방 뒷쪽
 
본래 아자방이 스님 수도하던 방이라 몇 년에 걸쳐 수리하고도 일반인에게는 개방을 안 합니다.
 
[개설]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 반야봉(般若峰) 남쪽, 쌍계사 북쪽 30리에 있는 사찰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1568년(선조 1) 부휴(浮休) 선사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 금담(金潭)과 그 제자 대은(大隱)이 중창하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완전 소실되어 오랫동안 재건되지 못하였다. 
1978년 이후 문수전(文殊殿)·보광전(普光殿) 등이 중창되었으며, 1982년에 아자방(亞字房) 건물이 복원되었다. 
아자방은 온돌방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이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 선사(曇空禪師)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는데도 한 번 불을 지피면 49일 동안 따뜻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좌우로 아자방과 문수전
 
 [건립 경위 및 변천] 
가락국 수로왕에게 아들이 10명 있었는데, 한 사람은 태자가 되고 두 사람은 어머니인 허황후의 성씨를 잇게 하였으며, 
나머지 7명은 속세와 뜻을 끊고 외삼촌인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여 수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일곱 왕자는 가야산·수도산(修道山)·와룡산(臥龍山)·구등산(九等山)을 거쳐 칠불사에 정착하여 일심으로 정진한 지 6년 만에 정각 성불하였다. 
수로왕은 6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며, 힘을 기울여 이곳에 대가람을 창건하고 불법을 크게 흥하게 하였다. 
 

 
신라 효공왕 대에 이르러 금관[현재의 김해]의 승려 담공 선사가 이 절에 와서 벽안당 선실을 아자형의 2중 온돌방으로 축조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아자방(亞字房)이다. 
한 번 불을 지피면 여러 날 보온이 된다는 불가사의한 수법으로 인해 『세계건축사전』에 올라 있다. 
아자방은 동국 제일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문수 동자의 화현 설화 등 많은 설화와 함께 역대에 무수한 도인을 배출하였다. 
고려 시대의 대선사인 청명 화상(淸明和尙)을 비롯하여, 조선 중종 대의 추월(秋月) 조능 선사(祖能禪師) 등이 대표적이다. 
조능 선사는 벽송(壁松) 지엄 조사(智嚴祖師)의 제자로서 견고한 용맹 정진으로 큰 힘을 얻은 분이다. 
평생을 눕지 않고 밤중이 되면 돌을 짊어지고 수행하되, 쌍계사까지 가서 육조 정상 탑전에 참배 발원하고 돌아오는 고행을 관철함으로써 
수마(睡魔)를 조복 받고[졸음을 쫓고] 조사관(祖師關)[수행자가 통과해야 할 관문]을 타파하였다. 
지금도 그 석괴(石塊)가 남아 있어서 수행승들의 경종이 되고 있다. 

 

 

 
선조와 광해군(光海君) 대에 서산 대사(西山大師)와 부휴 선수(浮休善修) 등이 주석하면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사우(寺宇)를 중건하였다. 
그 뒤 사제 관계인 금담 율사(金潭律師)와 대은 율사(大隱律師)가 서상수계(瑞相受戒)를 받아 칠불계맥(七佛戒脈)을 세우고 
1830년(순조 30) 재난으로 소실된 가람을 양대 율사의 계덕(戒德)으로 완전히 복원하였다. 
그 후 칠불사의 명성은 천하에 높았으니, 다승(茶僧) 초의 선사(草衣禪師)도 이곳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저술하였으며, 
용성(龍城)·석우(石牛)·금오(金烏) 등의 선사들도 여기에서 운수납자(雲水衲子)[수행승]들과 더불어 수행하였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퇴락하였던 당우들을 서기룡(徐起龍) 화상이 중수하였으나, 1949년 지리산 전투의 참화로 이 절이 완전히 불타 버렸다. 
1965년 이후 제월(霽月) 통광 화상(通光和尙)이 행각을 하다가 잿더미가 된 유적을 보고, 중창 복원을 기약하며 발원하였다. 
문수성전에서 천일기도를 하여 몽중가피(夢中加被)[꿈 속에서 부처의 덕을 입음]와 현증가피(顯證加被)[현실에서 영험을 받는 것]를 받았으며, 
여러 지역의 신심 있는 단월[신도]들이 운집하여 동참하고 정부에서 협조하여 큰 불사를 일으켰다. 
이후 1978년 부터15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복원 불사가 진행되었다. 
 
[활동 사항] 
매월 정기적으로 관음재일과 보름 법회를 열어서 불법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현재 칠불사에는 대웅전, 문수전, 운상원(雲上院), 설선당(說禪堂), 보설루(普說樓), 
원음각(圓音閣), 선다원 등의 전각과 칠불사사적비, 초의선사다신탑비, 문수동자탑, 부도탑 등의 탑비 및 일주문, 영지, 요사채 등이 있다. 
운상원은 ‘구름 위의 집’이라는 뜻으로 칠불사 골짜기가 구름 바다가 될 때 이 곳이 구름 위에 드러나므로 운상원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영지

 



광광버스 한 대에서 절 순례객이 가을의 산사 나들이를 왔습니다.

 

11: 59. 주차장 도착으로 오늘의 짧은 마지막 단풍산행을 마감합니다.

 





읽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산행 많이 하십시오.

 

  琴 農  姜  鎬  元  拜 上

 

 

 
 6 Comments
夢지리  11.10 21:58  
날씨가 좋으니 같은골 다른 느낌입니다.
덕분에 즐감합니다.
오늘 저도 똑같은 코스로 다녀왔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강호원  11.11 07:46  
하루 차이지만 어제 일요일은 종일 날씨가 흐렸으니
빛의 도움이 없어 단풍이 화사하지 못하고 좀 밋밋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일원  11.11 07:12  
축복 받은 날씨에 단풍 산행 그림이 혼자
보기 아깝습니다. 산사의 노란 은행잎은 도심의
가로수 은행잎 보담 색상이 훨 우월 하군요~
선수 스님 임종게가 한편의 詩 같이 느껴집니다.
산행기 고맙습니다. 늘 안산과 즐산입니다~~~
강호원  11.11 07:53  
박선생, 잘 계시지요?

단풍 산행 그림이 혼자 보기 아깝다면,
제 산행기를 주변에 널리 알리시면 여럿이 볼 수 있습니다. ㅎ

산행기를 정독하시니 [부휴 선수] 스님의 임종게가 눈에 들어오셨군요.

참, 이번 음악은 낯선지 언급이 없군요. ㅋ
쇼팽의 녹턴(야상곡) 20번입니다.

항상 제 보잘것없는 산행기를 애독해주시니,
고맙습니다.
山용호  11.11 10:38  
ㅎㅎ 저것은 산삼보다 약효가 좋다는 연동골 가을단풍....
덕분에 저도 눈요기나마 약효를 훔쳐 마십니다.ㅎㅎ
그날 저는 하동 분지봉 한바꾸..역쉬 하늘이 쵝오였습니다..
강호원  11.11 10:50  
아!
제가 산삼보다 좋은 것을 복용했네요. ㅎ

우리 지리99 회원 중 분지봉을 오르는 분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구재봉은 많이 찾지만.

가볍게 한 바리 하기 좋은 낮은 산이죠.
적량면 신촌마을, 하동읍 서제마을, 먹점마을 등 접근도 다양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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